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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규영 May 19. 2019

글쓰기는 소통이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내 책은 남이 읽는다

    잘 쓴 글이란 어떤 글일까. 모든 장르, 목적을 막론하고 잘 읽히는 글이다. 그것은 단순히 문장이 쉽다거나 단순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글을 읽기 쉽다는 것은 작가가 글에 많은 신경을 쏟았다는 증거가 된다. 모든 작가는 주제를 골똘히 생각하며 글을 써야 하는 것도 맞지만, 그 매체로 '글'을 택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볼 필요가 있다. 이번 단원은 글을 꽤 써본 작가와, 글을 처음 써보려는 작가를 나눠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니 처음 읽는 독자들도 포기하지 않길 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름의 습작 기간을 거쳐서 '꽤 써본'에 해당하는 것을 읽어본다면 새로운 맛을 느낄 것이다.






    글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상식적일 것이다. 우선은 글을 처음 써보는 당신을 대상으로 한 번 설명을 해보자. 우리는 글을 쓰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할 말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현대사회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싶다는 목적이라면 그것에 대해 써야 할 것이고, 첫사랑에 대해 쓰고 싶다면 첫사랑에 대해 쓰면 된다. 그리고는 첫사랑과 했던 데이트, 첫 키스, 허무맹랑함, 그리움 같은 것들을 나름 이야기로 바꿔보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맑은 날이었다' 같은 초보적인1) 주제 드러내기로도 만들어내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첫사랑과 안타깝게 헤어지는 결말을 뽑아냈다고 치자.


    그렇다면, 처음 써보는 당신은, 그 글을 누군가가 읽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쓰는 것이 좋다. 종이에다가 이야기를 붙여놓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생각은 버려라. 우리는 독자와 필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독백을 옮겨놓은 것이 소설이고, 독자는 그 글을 읽을 것이다. 즉, '소통' 또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혼자서 마구 떠들어대는 구도의 대화일 테지만, 분명 독자는 듣고 있다. 보고 있다. 그냥 멋있어 보이는 글을 쓰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실제로 그것이 멋있다 해도 말이다. 제대로 된 글이라면 독자를 배려해야 마땅하다. 말했듯이, 우리는 독자와 필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니까.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이 모르는 것,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로 잔뜩 채워놓은 '멋지고 기묘한 이야기'는 별로 읽고 싶지 않아 진다. 어느 정도 이론을 학습한 사람이라면, 억지로 이론 집어넣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나름 상징성을 넣어보겠다고 남들은 알지도 못하는 자연물을 데리고 올 필요도, 공간에 의미를 부여할 가치도 없다. 모든 작가들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고려하며 글을 쓴다. 왜냐면, 글 쓰기란 것은 '대화'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글은 읽지 않을 것이고, 읽지 않는 글은 쓸 필요가 없다. 글이란 것은 읽으라고 있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글을 좀 모르는 당신은, 이전 장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주제를 골똘히 생각"하며,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볼 여유를 만드는 것이 좋다. 쉽게 생각해보자. 당신과 독자가 둘이서 얘기를 하고 있다. 당신이 한 시간 정도를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댄 뒤, 독자의 반응은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는 것이면 슬플 것이다. 이야기가 어찌 됐든 간에, 당신이 얼마나 신경을 썼든지 간에, 전달에 실패한 것이다. 결과가 그렇다. 자신이 의도한 것들이 전달에 실패한다면 독자는 흥미를 잃을 것이고, 이야기에서 뭔가를 얻어가지도 못할 것이다. 오히려 맹렬하게 비난할 수도 있다. 독자들은 자신의 귀한 시간을 내어서 당신의 글을 읽었으니까 달게 받자.


    글에 담긴 것을 '독자가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전달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독자를 배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당신과의 대화에서 대놓고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얼른 재밌는 이야기를 내놔, 교훈 같은 것도 있으면 괜찮고." 선술집에 온 주정뱅이처럼 당신에게 주문하고 있다. 그에게 쪽지를 건네줄 때, 우리는 이야기를 한 편 보여주면 된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주제)은 주인공이 겪게 두면 된다. 그런 이야기를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독자는 박수를 쳐줄 것이다. "좋아, 쓸만하네." 하고. 그 주정뱅이마저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도록 노력해보자.


    꽤 쓸만한 작품들을 읽었을 때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한 작품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되는 장면을 많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장면 때문에 페미니즘으로 해석할 수 있고, 어떤 장면은 자본주의를, 어떤 장면은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면서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게끔 만들어놓는다. 그건 대단한 작업이 아니다. 그냥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이야기이다 보니까 주제는 조금 두루뭉술하게 나타난다. 여러 요소를 동시에 보여줄 수밖에 없다. 세상을 복제해놓은 '이야기 속 세상'에 한 가지 요소만 있을 수 있기가 더 힘들다. 맹렬하게 한 가지 요소에만 집착해서 보여주는 소설은 꺼리는 게 좋다.2) 작가는 그냥 이야기만 들려줬을 뿐인데, 독자들은 애를 써서 자신만의 해석을 보여주려 한다. 이것은 올바르게 소통한 것이다. '이야기' 자체는 효과적으로 전달이 된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 된 셈이다. 이 경우,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는 말이 아니라, "그래서 그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도 되고, 이런 이야기도 되는구나!"가 된다.


    당장 모든 맥락을 이해하긴 어렵다고 본다. 기억해둘 핵심은 이것이다. "말을 해도 알아듣게 해라." 왜? 글이란 것은 누군가가 읽어야 하니까. 그것은 곧 대화니까. 내가 적으려는 글이 상대방에게 전달이 될 지 고민해보자.








    글을 어느 정도 써본 당신. 나와 말이 통했으면 좋겠다. 작가와 독자는 분명히 나눠져 있다. 그러나 당신이 쓰는 글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나? 그렇다면, 독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정말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 위의 글을 먼저 읽는 게 좋겠다. 위의 말과는 조금 다른 말을 하고자 한다. 왜냐면 독자를 배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독자'에 대해서 말할 거니까.


    독자는 한 종류만 있지 않다. 미취학 아동이 당신의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 자의식 과잉의 중학생이 읽을지도 모르고, 당신을 과소평가한 시니컬한 대학생이 글에서 약점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들 모두를 감당할 수 있나? 그보다도, 그렇게 독자를 나눠본 적은 있는가.


    나는 독자를 5개 층위로 나눈다. 1차 독자부터, 5차 독자까지. 이는 소통을 위해 필수적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문맹부터 당신을 능지처참할 평론가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아야 한다. 다행인 것은, 내 이론상으로는 이해시켜야 할 독자는 3차 독자까지다. 그 층위 구분은 '글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가 기준이다.


    1차 독자 이야기의 흐름을 간신히 이해한 수준이다. 그 이상의 해석을 하지 않고, 글의 재미, 내지 겉으로만 드러나는 소재들로 사회에 대입시켜보는 수준이다. 수준이라는 말에 너무 자아도취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이 독자들을 매료시킬 줄 알아야 한다. 이 분들을 매료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글이 재미가 없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글은 재미가 없다면 그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추락한다.


    2차 독자란, 글 전체를 감싸는(혹은 관통하는) 주요 맥락을 파악하여 이야기 너머의 '주제'를 발견하는 수준을 말한다. 이것은 '파시즘으로 본 <XX>' 같은 대학 과제 제출용 리포트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이야기 속에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하나의 맥락을 찾고, 그것으로 이야기의 모든 당위를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따지자면 일상에서 문학을 영위하는 상위 10% 정도의 지식인이 아니면 거의 1차 독자라 규정해도 무관하다.


    3차 독자란, 서사 이론, 문학 이론을 곁들여서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내며, 작품으로 사회, 인간의 풍습3)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하는데, 평론가라고 이해해도 좋다.


    4차 독자란, 작가 본인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타인에 해당한다. 이미 작품 감상의 층위에서 벗어나서, 이해에 목적을 둔 독서라 할 수 있다.


    5차 독자란, 퇴고하는 작가를 말한다.


    이 독자들을 모두 사로잡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글은 분명히 어떤 독자층을 예상하고서 쓰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거기서 사용되는 '층'은 사회의 층을 말하는 것이지, 예술 감상자의 층위를 나누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술 감상자는 모두가 동등하다. 그러나 감상의 질은 다를 수 있다. 그 질마저 예측하고서 모두를 감동시키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1차 독자를 사로잡으려거든 글이 재미있어야 한다. 즉, 갈등이 첨예하고 주인공의 내면을 변화시킬 만큼 주인공을 괴롭혀야 한다. 2차 독자를 사로잡으려거든 나름의 주제의식을 염두하며 작품의 톤을 조절해야 할 것이다. 3차 독자를 사로잡으려거든 1차 독자와 2차 독자를 동시에 사로잡으면 된다.

    주제의식이 튼튼하고4) 재미있는 글은 가만히 둬도 평론가가 현대적 가치를 뽑아내 준다. 믿고 맡기면 된다.


1) '초보적인'이라는 말에 너무 실망하지 말자. 그것은 '원시적'이라서 초보적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500년 정도 유행에 뒤떨어진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좋다. 글을 얼마 써보지 않았는데도 '원시'의 형태가 나온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서사 능력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힘을 내자!


2) 작가가 우울하다고 글이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다. 작가가 분노했다고 글까지 분노한 경우가 많다. 그건 땡깡이다. 작가가 어떤 마음을 느꼈던 상관없이, 그것에 초연해진 다음, 그 감정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교를 부려야 마땅하다. 여기서 '효과'라는 말은 좀 더 곱씹어보는 게 좋다. 독자가 흥미를 느낄까? 일차원적인 분노 표출식 주제 도출은 심각하게 원시적이라서 쓸모가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반박은, "그렇다면 주제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느냐?"다. 그렇다면 이렇게 얘기를 해보자. 여자 친구를 참으로 사랑한 남자가, 이별 통보를 받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사랑'과 '데이트 폭력'과 '집착' 등 여러 면모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 근데 "범죄는 당장 내게도 닥쳐올 수 있다!"가 주제라면 어떨까? '데이트 폭력'이라는 커다란 맥락은 그저 그렇게 해석하게 두면 된다. 왜냐면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서 [남성의 데이트 폭력]이 존재하는 사회를 복제해뒀으니까. 주제 때문에 [남성의 데이트 폭력]이 있는 건데, 독자는 그것도 하나의 해석으로 둬준다. 참으로 착하다. 예시가 너무 단순해서 안타깝다면, 소설 이론 중 '해석의 다양성'을 알아보는 것도 좋다.


3) 풍습이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시간상 현대라는 증거물들을 풍습이라고 하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전반,  사상 전반 따위를 나타낸다. '삶'으로 이해해도 좋다. 좀 더 '배운' 층위의 작가라면 '소설사史'를 설명할 때의 '풍습'이라는 단어를 생각해주면 좋다.

4) '대충 쓰지 말라'라는 이전 단원에서 배웠듯, 주제를 생각하는 집중력이 끊기지 않고 작품에 끝까지 녹아난 것을 앞으로는 '튼튼하다'라고 표현해보자. 마치 하나의 기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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