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혹은 덕분에 그 한 끗 차이
나는 수줍고 수줍고 또 수줍은 아이였다.
어른들이 용돈을 주셔도 엄마 뒤에 숨어 엄마 치마꼬리만 배배 꼬던,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 이어도 입 밖으로 뱉는 것이 어려웠던,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께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장을 벌렁거리던. 말대답을 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던 시절이기도 했고, 권위적인 부모의 정서 덕분이기도 했을 거다. 표현을 하면 맹랑한, 안 하면 우유부단한 아이가 되던 시절. 타고나기를 섬세하고 타인에 대한 통찰이 있던 내게 관대한 환경은 아니었다.
"너는 왜 그렇게 우유부단하니"라는 질책에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엄마는 알지 못했다. 부모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대답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고, 솔직한 대답을 했다가 떨어질 불호령이 두려워서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정말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어째서 부모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대답을 강요하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렇게 수줍고 내향적인 나에게 장부 못지않은 결단력과 그 결정에 대한 추진력이 있다는 것을 다 커서야 알았다. 일상다반사의 잔잔한 고민은 몇 날 며칠을 하고도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크고 중차대한 사항은 오랜 시간 고민하지만 결단은 무 자르듯 깨끗했다. 결정이 되면 바로 다음 스텝을 밟았다. 아이들 유학도 그랬다. 나는 많이 가지지 않은 싱글맘이었다. 그러니 누구는 무모하다고 했고, 누구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했다. 그 시절 나를 응원한 이는 없었다.
나는 무소의 뿔처럼 나아갔다.
우리 아이들이 일생의 단 한 번뿐인 청춘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랐다. 공부니 대학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닦지 않아도 빛나는 그 시절이 두고두고 행복하게 기억되길 바랐다.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는 아이들의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기상 시간에 깨워본 적 없을 만큼 학교 가기를 좋아했고, 친구들을 좋아했다. 놀이터에서 흙을 잔뜩 묻혀온 교복 치마를 보면 귀여웠고, 사인펜이 난무한 셔츠를 보는 날은 나도 함께 자유로웠다. 그것으로 행복했다. 훗날 그때 강제로라도 공부를 시키지 않은 내가 원망스럽진 않았는지 아이들에게 묻지는 않았지만,,,,,
큰아이는 사립여고에 배정이 되었다. 추첨제였다. 이사 문제로 그렇게 된 것인데 명문 대학을 많이 보내서 유명세가 있는 학교였다. 아이는 달라진 분위기와 환경에 적응이 어려웠다. 대학을 못 가면 좋은 직장 좋은 남자도 못 만나는 쓰레기 취급을 한다고 했다. 문제 하나로 달라지는 점수에 친구끼리도 얼굴을 붉히는 학교. 아이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친구 같던 중학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큰아이는 내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다. 나무토막처럼 온몸이 뻣뻣해지고 눈을 뒤집는 아이를 붙잡고 나는 결심했다.
내 아이들의 청춘을 재단하는 것을 그냥 놔둬서는 안되지!
이곳을,
떠나자!!!
두 번 고민도 없이 집을 내놨다.
첫 번째 태국으로의 이주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