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 끗 차이
큰아이는 고1, 작은아이는 중2였다.
큰아이의 담임선생님은 기본 회화도 되어있지 않은 17세의 아이가 타국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우려하듯 말했지만 절반은 조롱에 가까웠다. 작은 아이의 담임은 '해맑은 아이'지만 외국에서는 정말 신경을 많이 써주셔야 할 거라는 조언(?)을 했다. 여느 엄마와 같지 않던 내게 아이를 방치(?)한 죄를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과연 우리 아이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제자에 대한 알량한 그녀의 가치관에 대하여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우리 아이가 참 좋아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거나 늦잠을 자는 일이 없어요. 자기가 매일 1등으로 학교에 간다고 자랑을 해요. 학교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죠. 저는 학교와 친구를 좋아하는 우리 아이가 대견해요. 00 이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자랄 거예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내 아이를 함부로 재단할 자격이 어디에 있을까.
내 아이는 아직 피지도 않은 무한한 몽오리인데 말이다.
푸껫에 괜찮은 국제학교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 여타의 이유로 미국에서 일 년 여 거주한 적이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우월하지만 90년대는 그렇지 못했다. 어디로든 5분만 걸어도 밟고 눕고 뒹굴 수 있는 넓은 잔디가 있는 공원이 있었고, 체육시설에 놀이터 바베큐 등 선진적인 시설들, 아이들에 대한 듣도 보도 못한 환경의 미국에 나는 저절로 사대주의가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내 아이들이 다국적 아이들과 어울려 청춘을 만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엄마는 무적이 되었다.
셋이서만 여는 첫 챕터였다.
우리는 이민가방 몇 개에 100Kg이 넘는 짐을 담아 푸껫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순조롭진 않았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익숙하지 않은 영어를 들어야 했고, 버거워했다. 큰아이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간다면 정말 열심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요지였다. 태국을 오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마음을 알기에 1년만 버텨보자고 달랬다. 지금 돌아가면 두 번의 부적응이 그 아이의 마음에 빚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앞으로 아이가 만날 수많은 결정에 발목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이 내 아이에게 한 점의 그늘도 되지 않길 바랐다.
무엇보다 해보고 싶었다. 이 이주의 끝이 무엇일지 이 아이들과 함께 보고 싶었다.
훗날 작은 아이는 말했다.
"난 태국에 가고 싶지 않았어. 그때 한국에서 좋았는데, 내 의견은 묻지도 않았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언니 때문에 그랬지. 언니가 그때 쓰러지고 그래서 엄마가 엄청 놀랐잖아"
작은 아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언니 탓을 해?"
탓이 아니었는데.
함께 동고동락을 하며 수십 년을 살아온 딸아이가 내 마음을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아팠다. 명치부터 가슴으로 온몸으로 통증이 번졌다.
서운했다.
그랬다.
언제나 한 끗 차이인 것이다.
태국으로의 결정이 무모함이 아니라 누구에게는 용기였던 것처럼.
이유가 핑계로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때문이 아닌 덕분이었어야 했던 것처럼.
언니 덕분에 엄마가 태국을 알고 사랑에 빠졌지.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어.
병아리 같던 너희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만 너희와 함께여서 버틸 수 있었는데.
너희였기에 가능했는데.
바람이 있다면, 부디 너희들에게도 그저 힘들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기를.
기억 한 귀퉁이를 내어줄만한했던 성장통이었기를 욕심내본다.
많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