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환자의 소생실 입실을 알리는 다급한 무전이 울렸다. 병원 인근 공사장에서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된 환자였다. 서둘러 소생실로 가 보니, 외국인으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 청년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서둘러 측정한 혈압과 맥박 등 활력징후는 아직 괜찮았으나, 동공 반사가 없었다. 의식 수준은 글라스고우 혼수 척도 4점으로 거의 완전한 혼수상태나 다름없었다. 정수리 근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머리카락과 엉키어 덩어리 져 있었다. 두부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도 확보, 경추 고정 등 전문외상처치술에 따른 급한 처치를 마치고, 두부 CT를 진행했다. 예상대로였다. 영상을 본 의료진들은 저마다 “오우.”, “저런.” 따위의 감탄사를 내질렀다. 원래는 뇌가 있어야 할 공간을 거대한 핏덩어리가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뇌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사람의 뇌는 의식을 유지하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기능 외에도, 호흡 반사, 심박수 조절, 혈관 근육의 수축과 이완 등 생명 유지와 관련된 기능 또한 맡고 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얘기였다.
나는 즉시 신경외과 당직 의사를 호출하여 응급 개두술을 의뢰했다. 두개골에 구멍을 내고 뇌 주변의 피를 긁어내는 수술이다. 곧이어 도착한 신경외과 의사는 의무기록을 검토하고 신경학적 검사를 한 후, 담당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치료 계획을 상의했다. 그의 답변은 예상대로였다.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이 정도로 큰 뇌출혈은 수술을 하더라도 의식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고,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환자를 옮기고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등의 조작이 그나마 남아 있는 뇌 기능마저 망가뜨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대로 두면 얼마 간 더 살아있을 사람을, 괜히 일찍 죽게 만들 뿐이라는 얘기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가망 없는 환자의 호흡과 맥박을 유지하기 위해 연명의료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럽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연명의료를 중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그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에 체류 중인 외국인 근로자였다. 더구나 그는 청년이었으니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연명의료 서식 같은 것을 남겨두었을 리 없었다. 설령 남겨 두었다고 한들 본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그 서류를 확인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친권자 대리인, 곧 가족들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데, 그의 스마트폰에는 암호가 걸려 있어 가족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었다.
다행히, 암호를 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스마트폰 초기 화면에 오늘 아침에 걸려 온 부재중 통화 한 건의 알림이 남아 있었다. 원무 직원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환자와의 관계를 묻고, 응급실로 오도록 안내했다. 부재중 통화를 남긴 사람은 바로 그의 여자친구였다. 그는 환자와 비슷한 피부색을 가진, 아마도 같은 나라 출신일 것으로 보이는 동년배 여성이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 중인 환자의 모습에 잠시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본국에 있는 환자의 보호자들과 연락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는 아직 환자와 정식으로 약혼을 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환자의 부모들과는 잘 알고 지낸다고 했다.
나는 영상통화로 환자의 부모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서투르게나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여자친구와는 달리, 부모들은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 통역이 필요했다. 통역 담당 직원의 입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은 부모들은 믿을 수 없어하는 눈치였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는 그것이 실제 상황임을 깨달은 듯했다. 환자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고, 아버지는 제발 뭐라도 해 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나는 환자의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 환자가 한국의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 등을 고지하였다. 나아질 가망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보험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무시무시한 병원비도 큰 문제였다. 가족들은 원래도 형편이 좋지 않아 병원비는커녕 한국으로 들어올 비행기 표를 구하는 것만도 부담이 큰 상황인 듯했다. 그들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남겨질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현실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렇게 그들의 결론은 환자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엔 여자친구가 문제였다. 그는 응급실에 도착한 이래 줄곧 침착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협조했으며, 내가 환자의 부모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옆에서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동안 그가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의 상태가 생사를 논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와 환자의 부모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여자친구는, 우리에게 통사정을 하며 제발 환자를 살려 달라고 싹싹 빌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치료비를 댈 것이니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보험이 없어 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는 것을 듣고도 그 돈을 자신이 대겠다고 나서는 여자친구라니. 그가 환자를 얼마나 각별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여자친구일 뿐, 환자의 가족은 아니었다. 나는 법적인 보호자들의 의견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는 이번에는 환자의 부모를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는 환자의 부모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조금 전까지 쓰던 어설픈 한국 말과는 딴판으로 유창한 모국어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설득에 성공한 모양인지, 우리에게 돌아와 다음 치료를 진행해 달라고 했다.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는 중환자실로 입원하여 인공호흡기를 걸고 강심제를 투약하며 예정된 죽음의 순간을 최대한 늦추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나는 공연히 병원비만 들 뿐이며, 환자가 조만간 돌아가시게 될 것임에는 변함이 없음을 재차 설명했다. 하지만 확고하게 마음을 굳힌 여자친구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환자는 응급의학과에서 관리하는 중환자 병동인 응급중환자실로 입원했다. 병원비는 여자친구와 환자의 가족들이 적절히 나누어 부담하기로 했다는 듯했다. 병원비 지원이 가능한지 확인하고자 원내 의료사회복지 팀에도 문의해 보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지원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뒤 환자의 여자친구는 매일같이 환자를 찾아왔다. 면회 시간이 시작되면 누구보다 빠르게 병동으로 달려 들어왔고, 면회 시간이 끝나는 순간까지 환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다. 그러한 여자친구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태에는 차도가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실낱같이 남아 있던 호흡 반사마저 사라졌고, 뇌파 검사에서도 아무런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이제 그의 뇌 기능은 완전히 정지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공식적인 뇌사 판정 절차를 밟지 않았을 뿐, 사실상 죽은 사람인 셈이었다.
우리는 여자친구와 본국에 있는 부모들에게, 환자의 상태에 차도가 없으며 이제 뇌사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음을 설명했다. 부모들은 마음을 정리한 듯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아직 연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환자의 부모들이 자기 아들의 여자친구를 설득하려 했다. 그가 연인에게 충분히 책임을 다 한 것 같다고, 자신들의 아들을 그토록 소중히 여겨 주어서 고맙다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제 그만 편안히 보내 주자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완고했다. 그는 자기 아들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연인의 부모들에게 도리어 역정을 냈다.
그날 오후에 환자의 부모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들의 여자친구와 나눈 이야기를 우리에게 공유하면서, 제발 그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환자의 여자친구는 환자와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소꿉친구였다. 어른이 된 두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몇 년 전에 함께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양가 부모 모두 그들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고 언젠가 결혼을 할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말릴 생각도 없었기에, 두 사람의 동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두 사람이 했던 일은 본국에서 일하는 것에 비하면 큰 벌이가 되는 일이었지만, 중환자실 입원비를 댈 만큼 많이 버는 일은 아니었다. 모아 놓은 돈이 많이 있을 리 없었다. 환자의 부모도 그걸 알았기에,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몇 차례 연락하여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콩팥을 팔아서라도 치료비를 마련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고 했다.
환자의 부모는 자신들 뿐 아니라 그 여자친구의 부모들까지 나서서 그를 설득하고 있지만, 도저히 설득이 되질 않으니, 현지에 있는 의료진이 설득을 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여자친구의 뜻에 관계없이, 친권자인 부모들의 뜻대로 하시면 되는 일 아니냐고 하려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아들의 소꿉친구이자 그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딸만큼이나 귀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여자친구가 진심으로 콩팥을 팔 생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백만 원 단위로 쌓여가는 진료비 내역을 보면서, 이제 슬슬 그의 통장 상황을 걱정해야 할 시점은 맞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나는 그날도 면회 시간 한참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환자의 여자친구를 만나, 다시 한번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며 연명의료를 중단할 것을 권했다. 그는 웬일인지 평소와는 달리 화장도 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나의 제안에 극렬하게 저항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의외로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 그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기도만 계속했다고 했다. 그러다 어제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잠을 잤는데, 꼬박 한나절을 자고 일어나 다시 맑아진 정신으로 생각해 보니, 자신이 고집을 피우는 것이 자신, 자신의 부모, 연인의 부모, 그리고 자신의 연인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그날 면회에서는 연인의 손을 잡거나 울며 기도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서서 한동안 연인의 눈 감은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환자의 임종 절차를 진행했다. 완성한 연명의료 중단 서류의 내용대로, 환자의 혈관으로 흘러들어 가던 강심제를 중단하고, 인공호흡기 튜브를 빼는 과정이었다. 담당 교수님이 그 일을 하시는 동안, 나는 환자의 여자친구의 핸드폰으로 환자의 고향 집에 모여 있을 환자의 가족들이 영상 통화로나마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가족들은 내내 울음바다였지만, 여자친구는 오히려 옅은 미소를 띤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환자의 마지막 한 번의 심장 박동이 지나가기까지 내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교수님이 환자의 사망을 선언한 순간, 그제야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편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도록, 자기는 이제 괜찮음을, 더 이상 울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과거를 털고 일어나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말이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충격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있기 십상이며, 그 탓에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 때가 많다. 그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일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아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며,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를 망치고,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여 건강까지 해치기도 한다. 혹 누군가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로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오도록 권면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자기 삶을 돌보지 못할 정도의 슬픔이라고 해서, 꼭 나쁘다고만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피어나는 슬픔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것은 죽은 자의 삶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환자를 위해 콩팥을 팔아치울 생각까지 하던 그 여자친구의 모습에서도, 나는 안타까움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꼈다. 생전에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면, 그 여자친구가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하면서까지 살려내려고 했을 정도일까? 연인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한 남자와, 그 남자를 위해 자기의 콩팥까지 내어주려 했던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이다.
물론 이런 생각도 그가 실제로 콩팥을 팔지도 않았고, 병원비 부담에 짓눌려 파산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면, 이 이야기의 장르가 바뀌었을 테니 말이다. 그의 연인이 죽은 뒤로 벌써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그도 가슴 아픈 기억을 떨쳐냈을 것이다. 그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