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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Sep 04. 2023

감동의 유럽 여행, 로마에서 보낸 마지막 날의 여운

로마 날씨,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 동전 던지기 그리고 김치볶음밥

 로마의 마지막 밤이자, 유럽 여행의 마지막 밤입니다.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셨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대충 정리해 놨던 가방 속에서 이어폰을 꺼냈습니다. 수많은 플레이리스트 중 헛헛한 마음을 달래준 노래는 윤종신의 <내일 할 일>입니다. 항상 그렇지만 윤종신 가수의 가사는 무덤덤하면서 처절합니다. 여행 마지막을 맞이한 제 모습처럼요.


 ‘내일은 괜찮아도 바로 다가오는 다음 날부터 단 하나의 준비조차 없는데 그날부터 난 뭘 해야 하는 건지’

 흘러가는 가사에 푹 빠져 내일을 생각했습니다. 짐을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해야 합니다. 그 뒤엔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저녁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노래 가사처럼 단 하나의 준비조차 없습니다. 내일은 뭘 해야 할까요. 막연하게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 호텔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각종 투어를 다니느라 로마 시내 구경을 제대로 못 했거든요. 주요 관광 명소를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여서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현관 앞에 섰습니다. 객실에서 바라봤던 맑은 하늘은 사라지고 어두운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떠나는 마지막 날이 서운했는지 로마 날씨도 우울했습니다. 나서려던 걸음을 돌려 다시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호텔 로비에 앉아 떨어지는 우박을 바라봤습니다. 여행 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고 가는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이런 게 여행의 매력인가 봅니다. 한편으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엊그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한 것 같은데 벌써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반나절이란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로마 거리를 걸으며 이별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는데 내리던 우박은 사라지고 다시 맑은 하늘이 나타났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로비 안으로 쏟아졌습니다. 유럽 날씨는 변덕스럽네요. 마지막 날이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로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콜로세움’입니다. 로마제국 시절 축제와 스포츠 경기가 열린 곳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콜로세움 안에 들어가 사람들의 함성이 가득했던 순간을 상상해 보기로 했습니다.

 콜로세움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구글지도가 알려주는 곳에서 코너를 돌자 저 멀리 콜로세움이 보였습니다. 거리 끝에 있는 콜로세움은 양쪽에 대신들을 거느리고 왕좌에 앉아있는 황제의 왕관 같았습니다. 가는 길도 웅장하고 위엄 있었습니다. 길을 따라 걸어가자 콜로세움의 형태가 점점 커졌고 두근거리는 설렘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유명 관광지답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장엄한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붐비는 장소입니다. 약 2천 년 전, 경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모습이 제가 마주한 이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열정과 기대는 여전히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인파를 만나 콜로세움 내부 관람은 훗날로 미뤄야 했습니다. 대신 어느 때보다 느린 걸음으로 원형 경기장을 돌아보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던 콜로세움과 달리 로마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거리를 누볐습니다. 로마의 거리는 사람의 걱정을 지워주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거리를 걸었습니다. 이색적인 건축물과 로마 특유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다음 관광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삼거리 분수’로 표현할 수 있는 곳. ‘트레비 분수’입니다.

 높이 25.9m, 너비 19.8m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서 가장 큰 분수입니다. 이 넓고 큰 분수 앞에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약속 장소를 정할 때, ‘서면 지하 분수 앞에서 보자’라고 합니다. 로마에서 ‘트레비 분수 앞에서 보자’라고 하면 그날 약속은 파투 날 것 같습니다. 분수 물보다 사람이 더 많아 보일 정도였습니다. 방금 전 콜로세움에서 본 듯한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콜로세움을 관람한 후 트레비 분수로 오는 게 코스인가 봅니다. 마침 누군가 자리를 떠나는 모습이 보여, 그곳에 가서 트레비 분수를 바라보았습니다.

 맑은 햇살 그리고 분수를 장식한 물결이 만나 아름다운 윤슬이 분수대를 채웠습니다. 반짝이는 트레비 분수의 모습을 보며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었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트레비 분수에서 빼놓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동전 던지기’입니다. 분수를 등진 채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 위로 동전을 던져야 합니다. 분수에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되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낭만적인 전설과 달리 동전 던지기는 은근히 어렵습니다. 분수와 가까운 자리가 아니라면, 분수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멀거든요. 게다가 뒤돌아서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 위로 던져야 한다는 ‘룰’도 어렵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분수에 채 닿지 못하는 동전과 분수가 아닌 뒷사람 머리로 날아가는 동전도 더러 있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동전을 손에 쥐고 소원을 속삭였습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트레비 분수처럼, 한국으로 돌아가 만나게 될 일상도 아름답게 빛났으면 좋겠다.’는 소원입니다. 왼쪽 어깨너머로 던진 동전은 깔끔하게 트레비 분수에 내려앉았습니다. 옆에 있던 외국인은 박수를 치며 성공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트레비 분수를 빠져나왔습니다.


 동전을 한 번 더 던지려 했지만, 로마에 다시 오는 것만큼 행복한 소원은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밀려왔습니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건 일상에 여유가 생겼다는 거니까요. 주머니 속 동전을 잘 챙겨두었다가 다음번 로마 여행 때 사용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꼭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허기가 찾아왔습니다. 유럽 여행 마지막 날 찾은 음식점은 다름 아닌 한식당 ‘가인’입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매일 먹게 될 음식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먹는 한식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습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국인 사장님과 현지인 종업원이 한국어로 반겨주었습니다. 자리로 가던 중 김치볶음밥에 계란말이를 올려 먹는 손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음식을 결정했습니다. 마지막 날 점심은 이탈리아에서 먹는 김치볶음밥입니다.

 한국에서 파스타를 먹는 이탈리아 사람의 기분이 이럴까요. 반갑고 신기했습니다. 현지화되지 않은 한국 본연의 맛과 향이 담겨있었습니다. 볶음밥과 밑반찬이 정말 맛있어서 소주도 한 병 시킬까 했지만 국제 미아가 될까 봐 참았습니다. 그리운 한식으로 배를 채우고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어느덧 공항으로 갈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 날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짐을 챙겨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공항이 아닌 다른 도시로 이동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끝내 마지막 순간은 다가왔습니다. 고이 모셔놨던 여권과 한국행 비행기 표를 손에 들자 ‘진짜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로마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론 발 닿는 모든 곳에서 아름다음과 감동을 선사해 준 유럽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갑작스러운 퇴사로 사회에서 버려진 듯한 기분으로 살았는데 반갑게 품어준 유럽 도시가 고마웠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탑승 수속을 마무리했습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한 유럽 여행은 설렘과 행복을 거쳐 마지막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한국에 도착하면 그리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리움은 또 다른 여행의 계기가 될 것이며, 아름다운 기억의 시작이 될 거라 믿습니다. 제 인생 모든 순간 중 가장 강렬하고 감동적인 한 장면으로 기억될 유럽.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안녕, 나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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