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소렌토, 포시타노 그리고 나폴리 김민재
이탈리아 고속도로는 이상하게 낯설지 않습니다. 한국과 매우 비슷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고속도로가 이탈리아를 닮았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이탈리아를 벤치마킹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형태와 아펜니노 산맥이 반도를 따라 펼쳐진 지형은 우리나라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유익한 지식을 가이드에게 듣고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는 이탈리아 남부입니다.
뜨거운 햇살과 무더위가 반겨줬습니다. 서울 친구들이 부산을 찾으면 이런 기분일까요. 밀라노, 베네치아, 로마에서 느끼지 못한 뜨거운 날씨였습니다. 외투를 벗어던지고 반팔차림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발을 디뎠습니다. 가장 먼저 만난 곳은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입니다. 폼페이는 약 2천 년 전 고대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농업과 상업이 번성했던 도시이며 귀족들의 휴양지였습니다. 하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고작 18시간 만에 멸망합니다. 영광과 소멸을 고스란히 간직한 폼페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축물은 ‘원형 극장’입니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저는 무대 아래를 어슬렁거리며 입시 연기 대사를 중얼거렸습니다. 지하 소극장과 좁은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저에게 폼페이 극장은 감동적이고 영광스러운 장소였습니다. 텅 비어있지만 무대를 감싸고 있는 객석은 웅장함과 함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수천 년 전 이곳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객석으로 향했습니다. 객석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건축과 맑고 아름다운 하늘은 감동적인 공연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역시 저는 무대 체질이 아니라 객석이 제격인가 봅니다.
폼페이 거리는 인도와 차도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도는 차도보다 높게 만들었고요. 사람들이 도로를 건널 수 있도록 큰 돌을 놓아 횡단보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투어를 함께한 사람들 중 인도를 따라 걷는 사람이 있었고, 저처럼 차도를 걷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이드에게 들어보니 로마 시대 노예들이 마차를 끌고 차도로 다녔다고 합니다. 약 2천 년간 잠들어 있던 도시에서 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근과 상사의 핍박에 시달리며 일했는데, 전생이나 현생이나 똑같은 신분인가 봅니다.
유럽의 유일한 활화산 베수비오 화산의 열기가 전해지듯, 이탈리아 남부의 찌는 듯한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한 여름엔 어느 정도일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더위를 피해 들어온 식당에서 토마토 파스타를 먹으며 다음 일정을 준비했습니다. 남부 투어의 핵심이자 로망인 ‘소렌토’와 ‘포시타노’를 향해 달려갑니다.
시원한 버스 에어컨 아래에서 나폴리 해안을 감상했습니다. 하늘을 꼭 빼닮은 푸른 바다, 흰색 물감으로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듯 한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올려봤던 베수비오 화산도 다시 만났습니다. 구름을 안고 있는 화산은 폭발이란 단어와는 달리 평화로웠고 경이로웠습니다. 특히나 청량함을 품은 하늘과 에메랄드 빛 해안은 잠수함을 타고 수중을 지나가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습니다. 버스를 세우고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마음이 ‘소렌토 전망대’에 도착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버스 앞자리에 앉은 덕분에 누구보다 빨리 소렌토를 맞이했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미쳤다’는 과격한 말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습니다. 푸른 지중해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맑고 청명한 하늘이 구름과 어우러져 보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잊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온음료를 들고 있으면 멋진 CF의 한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절벽은 금방이라도 물속에 뛰어들 것처럼 역동적이었습니다. 코발트빛 바다와 자연이 만든 소렌토의 절벽은 아무렇게나 찍어도 A컷이 나왔습니다. 막 찍어도 그림이 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봅니다. 수채화 보다 더 수채화 같은 환상적인 광경을 만끽했습니다. 무더위를 이겨내고 달려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숨을 가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소렌토. 구글 지도에 소렌토 전망대를 저장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환상적인 소렌토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남부 투어의 하이라이트, 포시타노로 가는 길에 들어서자 멀미가 찾아왔습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는 멀미 정도는 이겨내야 하나 봅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 들어선 버스는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버스 앞자리에 앉아 기사님의 폭풍 핸들링을 감상했습니다. 지중해의 거친 파도를 뚫고 가는 선장 같았습니다. 고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하얀 절벽 아래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 닿자 버스 엔진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드높은 산을 올려다봤습니다. 파스텔 톤의 주택이 절벽을 따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포시타노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TOP5’ 중 하나라고 합니다. 문을 열면 푸른 지중해가 넘실거리듯 들어와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듭니다.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이 묻어나며, 따스한 햇살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입니다. 포시타노의 집값은 평당 얼마나 할까요. 궁금증을 억누르고 버스가 달려왔던 길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걸어내려 갔습니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에메랄드 빛 해안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세계적인 명소답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해변에 누워 포시타노의 햇살을 온몸으로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레몬 맥주를 마시며 바다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는 이들도 만났습니다.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에메랄드 빛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름다움에 침잠하여 자유를 느끼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수영 마니아로서 수영복을 챙겨 오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될 것 같습니다.
수영복은 구할 수 없었지만 레몬 맥주는 놓칠 수 없었습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장님에게 이끌려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온통 레몬 세상인 가게에서 가장 먼저 집어든 건 맥주였습니다. 레몬의 상큼함과 맥주 특유의 시원함이 어울려 청량함이 입 안에서 펼쳐졌습니다. 덥고 습한 포시타노에서 만난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맥주 한 모금을 즐기며 골목 이곳저곳을 누볐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아름다운 바다도 파스텔톤 건물도 아닌, 한 장의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엔 반가운 얼굴이 보였습니다. 이탈리아 축구팀 나폴리의 센터백이자 대한민국의 자랑 김민재 선수였습니다. 멋진 플레이로 팬들을 열광케 만든 선수가 한국인이라 뿌듯했습니다. 여행 당시엔 나폴리 소속이었지만 33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이후 다른 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멋진 활약 덕분에 나폴리 사람들이 한국인을 만나면 더욱 반갑게 맞이했다고 합니다. 글을 쓰며 김민재 선수의 사진을 다시 봤습니다. 지금 봐도 감동입니다.
파란 하늘, 코발트 빛깔 바다 그리고 파스텔 건물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모여 포시타노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 파스텔 톤의 주택과 함께 어우러져 바다 위로 우아한 그림자를 드리운 절벽은 파라다이스로 가는 문이 열려있는 것 같았습니다. 환상적인 풍경은 세계적인 관광지라는 명성에 걸맞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시타노 해안에 있는 사람들은 평화로움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걱정도 불행도 없이 오직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여유를 가졌습니다. 이곳이 정말 파라다이스였습니다.
아름다움에 빠져 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남부 투어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어려울 때나 지칠 때,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과 경이로움이 함께한 이탈리아 남부에 감사를 전하며 숙소로 향했습니다. 차 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떠나는 길마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투어였습니다. 폼페이, 소렌토 그리고 포시타노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유럽 여행의 마지막 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