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작은 변화가 만든 큰 물결

by GLEC글렉

지난 겨울, 브뤼셀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EU Taxonomy 보고서 한 권은 내 인생에 작은 전환점이 되었다. 두툼한 보고서를 넘기며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이토록 세밀하고 구체적인 기준들이 과연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류 업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온 나에게 이 규정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명확한 나침반이었다. 2020년 유럽연합이 도입한 이 지속가능한 경제활동 분류체계는 마치 안개 속에서 등대를 발견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친환경'이라는 모호한 개념 속에서 헤맸다. 무엇이 진정으로 환경에 도움이 되는지, 어떤 투자가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EU Taxonomy는 그 답을 찾기 위한 구체적인 도구를 제공했다.


이 규정이 제시하는 여섯 가지 환경목표는 마치 체크리스트처럼 명확했다. 기후변화 완화, 기후변화 적응, 물과 해양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 순환경제로의 전환, 오염 방지 및 관리, 그리고 생물다양성과 생태계 보호. 각각의 목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녹색 투자의 새로운 언어

물류 현장에서 일하며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바로 '어떤 변화가 진짜 의미 있는 변화인가'였다. 전기차 한 대를 도입하는 것과 전체 운송 시스템을 친환경적으로 재편하는 것, 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EU Taxonomy는 이런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기준을 제시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작년 봄 한 물류 회사의 CEO와 나눈 대화였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친환경 기업이라고 자부했지만, EU Taxonomy 기준을 적용해보니 실제로는 많은 부분에서 미흡함을 발견했다고 털어놓았다. 단순히 디젤 트럭을 전기차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전체 운송 경로의 최적화, 재생에너지 사용, 폐기물 관리 시스템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기준이 오히려 기업들에게는 명확한 방향성을 제공했다. 2024년 현재 유럽 내 ESG 펀드의 70퍼센트가 EU Taxonomy 기준을 반영하고 있다는 통계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투자자들이 마침내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종종 이 변화를 언어의 통일에 비유한다. 마치 바벨탑 이후 흩어진 언어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는 것처럼, 그동안 각기 다른 기준으로 '친환경'을 정의했던 투자자들이 이제는 공통된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 속에서 꽃피는 변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린워싱 방지 효과였다. 오랫동안 업계에서는 실질적인 환경 개선 없이도 친환경 마케팅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얻는 기업들이 많았다. 하지만 EU Taxonomy의 정량적 기준과 엄격한 검증 절차는 이런 가식적인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한 금융 전문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숫자로 말해야 합니다. 탄소배출량이 얼마나 줄었는지, 재생에너지 사용률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모든 것이 데이터로 증명되어야 하죠." 그의 말처럼 2024년 기준으로 유럽 주요 은행들의 녹색 채권 발행 규모가 전년 대비 40퍼센트 증가한 것도 이런 투명성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물류 업계에서도 구체적인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기 배송차량 도입률이 2024년 기준으로 전년 대비 60퍼센트 증가했다는 통계 뒤에는 수많은 기업들의 진정성 있는 노력이 숨어있었다. 단순히 규제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만들기 위한 투자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탄소중립 물류센터 구축 사례들이었다. 이런 센터들은 재생에너지 사용, 에너지 효율성 개선, 폐기물 재활용 시스템 도입 등을 통해 EU Taxonomy의 환경목표를 충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용 부담이 크다고 여겨졌지만, 장기적으로는 운영비 절감과 브랜드 가치 상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디지털 기술의 활용도 눈에 띄었다. 스마트 물류 시스템, 자율주행 기술, 드론 배송 등은 운송 효율성을 높이고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이 모든 것이 EU Taxonomy의 기후변화 완화 목표와 직결되면서 투자 가치를 인정받았다.


미래를 향한 나침반

2025년부터는 EU 내 대기업들이 매출, 자본지출, 운영비용 중 EU Taxonomy 적격 비율을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시험 문제가 미리 공개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제 기업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모든 기업들이 이 변화에 발맞춰 갈 수 있을까? EU Taxonomy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ESG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특히 유럽 시장에서의 자금 조달 비용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한 규제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변화에 대해 희망적이다. 물류 업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느낀 것은, 진정한 변화는 항상 명확한 기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EU Taxonomy는 그런 기준을 제시했고, 이제는 우리가 그 기준에 맞춰 행동할 차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는 EU Taxonomy 기준에 맞춰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혁신적인 기술이 개발되고 있고, 친환경 운송 수단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EU Taxonomy라는 작은 문서가 있다.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작은 규칙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EU Taxonomy는 바로 그런 작은 시작이었고, 이제 그 물결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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