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출권 거래제 Part 1.
공기는 공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공기를 더럽히는 것도 돈이 든다니.
친구가 환경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면서 처음 들려준 이야기였다. 배출권거래제라는 것이 있어서, 기업들이 온실가스를 배출할 때마다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공장을 돌리면서 나오는 연기에 어떻게 가격을 매기지?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우리가 쓰레기를 버릴 때 종량제 봉투를 사는 것과 비슷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에 비용을 부과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줄이도록 유도하는 것. 이게 바로 배출권거래제의 핵심이었다.
사실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는 회의적이었다. 시장 논리로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가능할까? 기업들이 정말 돈 때문에 환경을 생각하게 될까?
하지만 현실은 놀라웠다. 유럽에서는 2005년부터 이미 18년째 운영되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2015년부터 시작해서 벌써 9년차였다. 더 놀라운 건 이 시장의 규모였다. 2021년 기준으로 전 세계 탄소시장 규모가 7,600억 유로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돈의 힘은 정말 대단하구나.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기업들이 환경 규제를 피하려고 온갖 핑계를 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먼저 나서서 감축 기술에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게 더 돈이 되니까.
배출권거래제의 원리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정부가 먼저 전체 배출량의 상한선을 정한다. 영어로는 Cap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한도 내에서 기업들이 배출권을 사고팔 수 있게 한다. Trade다. 마치 제한된 수량의 입장권을 가지고 사람들이 거래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보자. A회사는 올해 100만 톤을 배출할 계획인데 할당받은 배출권은 80만 톤뿐이다. 그럼 20만 톤만큼의 배출권을 더 사야 한다. 반대로 B회사는 60만 톤만 배출했는데 할당받은 배출권이 80만 톤이라면? 남은 20만 톤을 A회사에 팔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소에 가격이 매겨진다. 그리고 이 가격이 기업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배출권을 사는 것보다 감축 기술에 투자하는 게 싸다면? 당연히 감축에 투자한다.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종량제 봉투가 도입되기 전에는 음식물 쓰레기든 뭐든 마구 버렸다. 하지만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돈이 들기 시작하자 어떻게 됐나?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하게 됐다.
배출권거래제도 마찬가지다. 온실가스를 배출할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니까, 기업들이 스스로 배출량을 줄이려고 한다. 정부가 일일이 감시하고 처벌하지 않아도, 시장의 힘으로 자발적인 감축이 일어나는 것이다.
처음엔 탄소세와 헷갈렸다. 둘 다 탄소 배출에 비용을 부과하는 건 같지 않나?
하지만 자세히 보니 접근 방식이 달랐다. 탄소세는 정부가 세율을 정해서 톤당 얼마라고 고정한다. 반면 배출권거래제는 총량은 정하되,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한다.
탄소세는 가격은 확실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감축될지는 알 수 없다. 배출권거래제는 감축량은 확실하지만 가격이 얼마가 될지는 시장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탄소세는 톤당 3만원이라고 정하면 그 가격은 고정이다.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감축될지는 알 수 없다. 반대로 배출권거래제는 올해는 전체 10억 톤까지만이라고 총량을 정하면 감축량은 확실하다. 하지만 배출권 가격이 얼마가 될지는 시장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나라는 배출권거래제를 선택했다. 2015년 아시아 최초로 국가 단위 제도를 도입했다. 왜 탄소세가 아닌 배출권거래제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확실성 때문이었을 것 같다.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 감축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상황에서, 감축량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국제적 흐름도 중요했다. EU를 시작으로 전 세계가 배출권거래제로 향하는 상황에서, 향후 국제 연계를 고려한다면 같은 제도를 채택하는 게 유리했다.
처음엔 회의적이었던 내가 이제는 이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변화의 실감 때문인 것 같다.
친구 회사 클라이언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로 변하고 있었다. 어떤 철강회사는 배출권 비용 때문에 공정 효율화에 수십억을 투자했고, 어떤 발전회사는 석탄보다 LNG 발전을 늘렸다고 했다. 어떤 시멘트 회사는 아예 새로운 저탄소 시멘트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힘이 이렇게 강력할 줄 몰랐다.
물론 한계도 있다. 친구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은 거래량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배출권시장은 유동성이 부족해서 가격 발견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90%가 무상할당이라서, 실제 현금 부담이 크지 않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유럽은 이미 50% 이상을 경매로 판매하는데, 우리는 아직 10%에 불과하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잖아.
친구는 긍정적이었다. 제도가 도입된 지 불과 9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뉴스에서 배출권 가격이 나오면 귀가 쫑긋해진다. 전에는 그냥 넘어갔을 기사들이 이제는 흥미롭게 다가온다.
배출권 가격 2만원대로 하락이라든지, EU 배출권 가격 사상 최고치 경신이라든지, 중국 배출권시장 거래량 급증이라든지.
이런 뉴스들이 이제는 경제뉴스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탄소가 하나의 상품이 된 세상.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다음에는 전 세계 배출권시장들이 어떻게 다른지, 각자의 특색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EU의 선도적 역할, 중국의 규모의 경제, 미국 지역들의 실험정신까지.
탄소시장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지도를 함께 그려보자.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