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출권거래제 Part 2.
같은 탄소인데 나라마다 가격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친구와 함께 세계 각국의 배출권 가격을 비교해보다가 깜짝 놀랐다. 유럽은 톤당 7만원, 한국은 2만원, 중국은 1만원도 안 됐다. 같은 지구 온난화를 막는 건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호기심이 생겨서 각국의 배출권거래제를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각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와 역사가 있듯이, 탄소시장도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2005년, 세계 최초로 문을 연 EU ETS는 탄소시장의 맏형 격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다. 탄소에 가격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실험이었으니까.
하지만 18년이 지난 지금, EU ETS는 전 세계 탄소시장의 교과서가 됐다. 다른 나라들이 제도를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하는 게 바로 EU ETS다.
처음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다. 1기에는 배출권을 너무 많이 나눠줘서 가격이 거의 0에 가까워졌다. 2기에는 금융위기 때문에 또 가격이 곤두박질쳤다.
실패를 통해 배운다는 말이 딱 맞았다. 매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제도를 개선했다. 3기에는 중앙집중식 할당으로 바꾸고, 4기에는 시장안정화 예비분까지 도입했다.
현재 EU ETS는 27개 회원국과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가 참여하는 거대한 시장이다. 톤당 60에서 80유로, 우리 돈으로 8만원에서 11만원이라는 높은 가격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탄소시장이기도 하다.
높은 가격에는 이유가 있다. 유상할당 비중이 50% 이상이고, 시장안정화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2030년까지 55% 감축이라는 야심찬 목표가 시장에 강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2015년 시작된 K-ETS는 아시아 최초의 국가 단위 배출권거래제다. 과연 될까 하는 우려 속에서 시작됐지만, 9년째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커버리지다. 국가 배출량의 73.5%를 커버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EU가 40%대인 것과 비교하면 그 포괄성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가장 큰 특징은 보수적 접근이다. 유상할당은 아직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무상으로 준다. 이는 국내 산업계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정책적 배려다.
덕분에 제도 도입 초기의 혼란은 최소화했지만, 시장 효율성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실제 현금 부담이 크지 않다 보니, 탄소 가격의 감축 유인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30년 40% 감축 목표가 발표되면서 제도 강화 압력이 커지고 있다. 유상할당 확대, 시장안정화 메커니즘 도입 등이 논의되고 있다.
2021년 7월, 중국이 전국 단위 ETS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비록 전력 부문만 포함하지만, 그 규모는 가히 압도적이다. 연간 40억 톤 이상의 CO2를 커버한다. 이는 EU ETS 전체 규모의 두 배가 넘는다.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이 탄소시장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참여로 글로벌 탄소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ETS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식 사회주의 색깔이 강하다는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되, 정부의 강력한 통제 하에 운영된다.
배출권 할당도 강도법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한다. 발전량당 배출량을 기준으로 할당하는 방식으로, 발전량이 늘어나면 배출권도 늘어난다. 이는 경제성장과 온실가스 감축을 동시에 추구하려는 중국의 의지를 보여준다.
미국에는 연방 차원의 배출권거래제가 없다. 대신 지역별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성공적인 게 바로 RGGI다.
2009년 시작된 RGGI는 미국 동북부 11개 주가 협력하는 프로그램이다. 발전 부문만 대상으로 하지만,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2009년 대비 배출량을 50% 이상 줄였다.
RGGI의 또 다른 특징은 경매 수익을 모두 청정에너지 투자에 재투자한다는 것이다. 배출권을 팔아서 번 돈으로 태양광, 풍력, 에너지 효율 개선 등에 투자한다. 이는 환경과 경제의 선순환을 만드는 좋은 사례다.
2013년 시작된 캘리포니아 ETS는 미국에서 가장 포괄적인 배출권거래제다. 전력, 산업뿐만 아니라 교통, 건물 부문까지 포함한다. 한국 다음으로 높은 커버리지를 자랑한다.
캘리포니아의 가장 큰 특징은 혁신이다. 가격 안정화 메커니즘을 일찍부터 도입했고, 경매 수익을 환경 정의 투자에 우선 배분한다.
캘리포니아 ETS는 퀘벡과 연계해서 운영되고 있다. 이는 국경을 넘나드는 탄소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앞으로 더 많은 지역과의 연계도 추진하고 있다.
뉴질랜드 ETS의 가장 독특한 점은 산림 부문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나무를 심으면 배출권을 받고, 베면 배출권을 내야 한다. 산림이 많은 뉴질랜드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설계다.
2019년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제도를 강화했다. 무료할당을 대폭 줄이고, 경매 비중을 늘렸다. 그 결과 배출권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2020년 시범 운영을 거쳐 2022년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 멕시코 ETS는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배출권거래제다. 북미 지역의 탄소시장 연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도 도쿄, 사이타마 등에서 지역 차원의 배출권거래제를 운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도 배출권거래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각국 배출권 가격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제도 설계의 차이가 가장 크다. 유상할당 비중, 시장안정화 메커니즘 유무, 커버리지 범위, 할당 방법론 등이 모두 다르다.
경제 발전 수준도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경제 발전 수준이 높을수록 탄소 가격도 높다. 환경에 대한 지불 의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지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정부의 탄소중립 의지가 강할수록 배출권 가격도 높아진다. 야심찬 감축 목표와 강력한 정책이 시장에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부터 EU의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이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 이는 전 세계 탄소시장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EU로 수출하려면 탄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미 국내에서 배출권거래제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만큼 차감해준다. 이는 각국이 자체 배출권거래제를 도입할 강력한 유인이 되고 있다.
앞으로는 개별 시장들이 점점 더 연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EU와 스위스, 캘리포니아와 퀘벡 연계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도 한중일 3국 간 탄소시장 연계 논의가 조심스럽게 시작되고 있다. 언어의 장벽, 제도의 차이, 정치적 갈등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경제적 이익이 워낙 크다 보니 결국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세계 탄소시장 여행을 마치고 나니,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탄소시장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각 나라마다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탄소에 가격을 매기고, 시장의 힘으로 감축을 유도한다. 이는 21세기 인류가 선택한 기후변화 대응 방식이다.
다음 여행지는 바로 우리나라다. K-ETS의 지난 9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30년을 전망해보자. 우리만의 색깔은 무엇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은 어디인지.
세상은 넓고, 탄소시장은 다양하다. 하지만 목표는 하나, 지구를 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