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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든 탄소시장, K-ETS 이야기

배출권거래제 Part 3.

by GLEC글렉

아시아 최초라는 게 이렇게 부담스러울 줄 몰랐어요.


2014년 말, K-ETS 준비 작업에 참여했던 공무원의 고백이었다. 당시 아시아에는 국가 단위 배출권거래제가 없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모든 게 실험이었다.


9년이 지난 지금, 그 실험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성공일까, 실패일까? 아니면 그 중간 어디쯤일까? K-ETS의 지난 9년을 되돌아보며, 우리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 보자.


시작은 코펜하겐이었다

모든 이야기는 2009년 코펜하겐에서 시작됐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2020년까지 BAU 대비 30% 감축을 선언했다.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파격적인 목표였다.


말은 했는데, 어떻게 달성하지?


이것이 당시 정부의 고민이었다. 30% 감축은 결코 만만한 목표가 아니었다. 기존 정책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새로운 정책 수단이 필요했다.


여러 옵션을 검토한 결과, 배출권거래제가 최적의 선택으로 떠올랐다. 탄소세보다는 산업계 수용성이 높고, 직접 규제보다는 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EU ETS라는 성공 사례가 있었다.


설계의 고민들

첫 번째 고민, 누구를 포함할 것인가

가장 먼저 고민한 건 적용 범위였다. EU처럼 전력과 제조업만 할 것인가, 아니면 더 포괄적으로 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더 포괄적인 길을 선택했다. 전력, 제조업뿐만 아니라 건물, 교통, 폐기물까지 포함했다. 그 결과 국가 배출량의 73.5%를 커버하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포괄성을 달성했다.


두 번째 고민, 유상할당을 얼마나 할 것인가

가장 민감한 문제였다. 산업계는 경쟁력 저하를 우려했고, 환경단체는 무료할당은 특혜라고 주장했다.


결국 타협점을 찾았다. 1기는 100% 무상할당으로 시작해서, 2기부터 점진적으로 유상할당을 확대하기로 했다. 연착륙을 위한 선택이었다.


세 번째 고민, 이월을 허용할 것인가

초기에는 이월을 허용했다. 기업들이 배출권을 저축할 수 있도록 해서 경영 유연성을 제공하려던 의도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기업들이 배출권을 과도하게 쌓아두면서 시장에서 거래를 하지 않았다. 거래량이 너무 적어져서 가격 발견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2017년부터 이월 제한을 도입했다. 배출권을 저축하려면 그만큼을 시장에 팔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9년간의 여정

1기, 첫걸음의 어색함

첫 걸음은 어색했다. 기업들은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정부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제도를 다듬어갔다.


가장 큰 이슈는 가격 급등이었다. 8,000원으로 시작한 배출권 가격이 2만원을 넘어섰다. 이월 제한 도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래도 되나?


처음 겪는 일이라 모든 게 불안했다. 하지만 시장은 예상보다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큰 혼란 없이 1기를 마감할 수 있었다.


2기, 제도의 안착

2기에 들어서면서 제도가 본격적으로 안착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유상할당의 도입이었다. 비록 3%에 불과했지만, 상징적 의미가 컸다.


기업들도 이제 제도에 익숙해졌다. 탄소 관리 조직을 만들고, 배출권 거래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시장 참여자들의 전문성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도 생겼다. 이월 제한 강화로 인해 배출권 가격이 급락했다. 시장 효율성과 가격 안정성 사이의 딜레마가 시작됐다.


3기, 성숙기로의 진입

3기는 K-ETS가 진정한 성숙기로 접어드는 시기다. 유상할당이 10%로 확대됐고, 참여 업체도 685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도 시작됐다. 2030년 40% 감축 목표가 발표되면서 제도 강화 압력이 커졌다. 동시에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등 외부 충격도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성과와 한계

분명한 성과들

제도 안정성 확보가 가장 큰 성과다. 9년간 큰 혼란 없이 운영됐다. 기업들이 제도에 적응했고, 정부도 운영 노하우를 축적했다.


탄소 인식 제고도 중요한 성과다. 기업들 사이에서 탄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이제는 CFO들도 배출권 가격을 주시한다.


감축 투자 촉진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배출권 비용 때문에 감축 기술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에너지 효율, 연료 전환, 공정 개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투자가 이뤄졌다.


국제적 인정도 받고 있다. K-ETS는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제도가 됐다. 국제탄소행동파트너십의 핵심 멤버이고, 각종 국제 회의에서 우리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아쉬운 한계들

낮은 거래량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연간 거래량이 할당량의 10% 내외에 불과하다. 이는 가격 발견 기능을 저해하고 시장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가격 신호 약화도 문제다. 최근 배출권 가격이 하락하면서 감축 유인이 약화되고 있다. 강화된 감축 목표와 상반된 시장 신호다.


유상할당 비중이 여전히 저조한 것도 한계다. 90%가 무상할당이다. 이는 탄소 가격의 실질적 영향력을 제한한다.


위기의 순간들

2017년 가격 급등 사태

이월 제한 도입 소식에 배출권 가격이 8,000원에서 25,000원으로 급등했다. 시장에 패닉이 일었다.

제도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당시 정부는 긴급히 추가 할당을 검토했다. 하지만 결국 시장이 스스로 안정을 찾아갔다. 이때의 경험이 시장안정화 메커니즘 필요성을 깨닫게 해줬다.


2020년 코로나19 충격

코로나19로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배출량이 급감했다. 배출권 수요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오히려 가격이 4만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기업들이 미래를 대비해 배출권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시장의 학습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숨은 영웅들

기업 실무진들

K-ETS의 진짜 영웅은 기업 실무진들이었다. 처음 접하는 제도를 이해하고, 사내 시스템을 구축하고, 매년 보고서를 작성하는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어떤 회사는 전담 팀을 만들고, 어떤 회사는 외부 컨설팅을 받으면서도 차근차근 역량을 키워갔다. 이들의 집단 학습이 K-ETS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검증기관들

배출량 검증을 담당하는 검증기관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검증 기준도 명확하지 않고, 경험도 부족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 개 기업을 검증하면서 전문성을 축적해갔다.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검증 품질을 자랑한다.


미래를 향한 준비

시장 효율성 개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시장 효율성 개선이다. 거래량을 늘리고, 가격 발견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는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월 제한 완화, 금융기관 경매 참여 허용, 시장안정화 메커니즘 도입 등이다.


국제 연계 준비

EU CBAM 대응이 시급하다. 우리 수출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K-ETS의 국제적 인정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다른 나라와의 연계도 고려해야 한다. 동북아 탄소시장, 아시아-태평양 탄소시장 등의 구상이 논의되고 있다.


적용 범위 확대

2030년 40% 감축을 달성하려면 더 많은 부문이 참여해야 한다. 건물 부문 확대, 교통 부문 강화, 농업 부문 포함 등이 검토되고 있다.


9년 후의 소감

K-ETS를 9년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제도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설계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없다. 반대로 처음엔 부족해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면 좋은 제도가 된다.


K-ETS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정부, 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했기 때문이다. 물론 갈등도 있었고,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큰 방향은 같았다.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장의 힘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


다음 이야기

다음에는 배출권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그 뒤에 숨은 경제학적 원리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K-ETS 가격이 왜 그렇게 요동쳤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시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가격을 이해해야 한다. 탄소 가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경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9년은 짧지만 긴 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탄소시장이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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