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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의 가격은 누가 정하는가

배출권거래제 Part 4.

by GLEC글렉

주식처럼 매일 가격이 바뀐다고?


친구가 놀라워했다. 배출권도 주식처럼 매일 거래되고, 매일 가격이 바뀐다는 얘기를 하자 신기해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나왔다.


그럼 그 가격은 누가 정해?


좋은 질문이었다. 탄소에 가격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가격은 도대체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걸까? 정부가 정하는 걸까, 아니면 시장이 정하는 걸까?


답은 복잡하다였다. 탄소 가격 뒤에는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이론이 숨어 있었다.


수요와 공급, 그 영원한 법칙

공급, 정부가 만드는 희소성

배출권 공급의 특이한 점은 정부가 총량을 정한다는 것이다. 일반 상품처럼 더 많이 팔면 더 많이 벌어가 아니라, 이만큼만 허용이라고 딱 선을 긋는다.


한국의 경우 매년 약 6억 8천만 톤의 배출권을 공급한다. 이는 정책적으로 결정된 숫자다. 과학적 근거도 있고, 정치적 협상도 있다. 하지만 일단 정해지면 그게 그 해의 공급량이다.


희소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


자연적 희소성이 아니라 인위적 희소성이다. 금이나 석유처럼 땅에서 파내는 게 아니라, 정부가 이만큼만이라고 정하는 것이다.


수요, 기업들의 절실한 필요

반면 수요는 기업들의 절실한 필요에서 나온다. 공장을 돌리면 온실가스가 나오고, 법적으로 그만큼의 배출권을 제출해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수요량은 일정하지 않다. 경기가 좋으면 생산이 늘어나고, 배출량도 늘어난다. 여름에 더우면 에어컨을 많이 틀고, 겨울에 추우면 난방을 많이 한다. 수요는 살아 움직인다.


필요에 의한 수요, 하지만 유동적이다.


한계저감비용, 경제학의 핵심

배출권 가격의 진짜 비밀은 한계저감비용에 있다. 쉽게 말해서 온실가스 1톤을 추가로 줄이는 데 드는 비용이다.


기업별로 다른 감축 비용

A회사는 온실가스 1톤을 줄이는 데 1만원이 든다고 하자. B회사는 3만원이 든다. 그럼 누가 먼저 감축할까? 당연히 A회사다.


배출권 가격이 2만원이라면?


A회사는 1만원 들여서 감축하고, 배출권 1톤을 2만원에 판다. 1만원 이익이다. B회사는 3만원 들여서 감축하기보다는 2만원 주고 배출권을 산다. 1만원 절약이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감축 비용이 낮은 곳에서 먼저 감축이 일어난다. 이게 배출권거래제의 경제적 효율성이다.


균형점을 찾아가는 시장

결국 시장에서는 모든 기업의 한계저감비용이 배출권 가격과 같아지는 지점에서 균형이 이뤄진다.


배출권 가격이 A회사 한계저감비용과 같고, B회사 한계저감비용과 같고, C회사 한계저감비용과도 같아진다.

이때 사회 전체의 감축 비용이 최소화된다. 경제학이 말하는 효율성이 달성되는 순간이다.


가격을 움직이는 실제 요인들

첫 번째, 경제 성장률의 마법

경기가 좋으면 탄소도 비싸진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유럽 배출권 가격이 폭락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경기가 나빠지자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줄어들었다. 배출권 수요가 급감하니 가격도 떨어졌다.


한국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코로나19 초기에는 배출량이 줄어들 거라 예상했는데, 오히려 가격이 올랐다. 기업들이 미래를 대비해 미리 배출권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날씨의 횡포

여름 폭염은 배출권 가격의 적이다. 에어컨을 많이 틀수록 전력 소비가 늘어나고, 발전소에서 석탄을 더 많이 태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늘어나니 배출권 수요도 늘어난다.


겨울 한파도 마찬가지다. 난방 수요가 늘어나면 에너지 소비가 급증한다.


기상청 예보가 주식 시세만큼 중요해졌다.


세 번째, 에너지 가격의 연쇄 반응

석탄과 LNG의 가격 차이는 전력 부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석탄이 상대적으로 싸면 석탄 발전이 늘어나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늘어난다. 배출권 수요 증가로 이어진다.


반대로 LNG가 경쟁력을 갖게 되면 상대적으로 깨끗한 LNG 발전이 늘어나고, 배출권 수요는 줄어든다.


네 번째, 정책 변화의 충격파

배출권시장에서 가장 무서운 건 정책 불확실성이다. 정부가 할당량을 줄이겠다고 하면 가격이 오르고, 이월을 허용하겠다고 하면 가격이 내린다.


한국 배출권 가격의 역사는 곧 정책 변화의 역사다.


2017년 급등은 이월 제한 도입 소식 때문이었고, 2020년 최고가는 3기 할당계획 지연과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2021년 하락은 3기 계획 확정과 상대적 완화 때문이었다.


한국 배출권 가격의 특이한 여정

8천원에서 시작된 모험

K-ETS가 시작될 때 배출권 가격은 8,000원이었다. 어떻게 정한 가격이었을까? 사실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 EU ETS 초기 가격, 예상 감축 비용 등을 종합해서 적당한 수준으로 정한 것이었다.

첫 가격은 늘 추측이다.


2만원대 돌파의 배경

2017년 이월 제한 소식이 나오자 가격이 급등했다. 기업들이 앞으로 배출권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리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 참여자들이 정책 변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4만원 돌파와 그 이후

2020년 3기 할당계획 발표가 지연되면서 불확실성이 커졌다. 할당량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가격이 4만원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실제 할당계획이 발표되고, 코로나19로 배출량이 줄어들면서 가격은 다시 하락했다.


현재의 2만원대

지금은 2만원대에서 안정되고 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3기 할당계획 확정으로 불확실성이 해소됐고, 이월 제한 완화로 공급이 증가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수요가 일시 감소했고, 재생에너지 확대로 배출량 증가세가 둔화됐다.


시장 구조의 숨은 문제

거래량 부족의 악순환

한국 배출권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거래량이 적다는 것이다. 연간 할당량 대비 거래량이 10% 내외에 불과하다.


왜 거래량이 적을까?


90% 무상할당이라서 돈 주고 산 게 아니니까 아까운 마음이 덜하다. 보수적 기업 문화로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니 일단 보관한다. 정보 부족으로 시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거래량이 적으면 가격 발견 기능이 떨어진다. 소수의 거래로 가격이 결정되니 변동성도 크다.


참여자 제한의 아쉬움

현재 시장 참여자는 주로 할당 대상 기업들이다. 금융기관의 참여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는 시장 유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EU ETS에는 은행, 헤지펀드, 심지어 개인 투자자까지 참여한다. 이들이 시장에 유동성을 제공하면서 가격 발견 기능을 개선한다.


미래 가격을 예측할 수 있을까

상승 요인들

2030년 40% 감축 목표로 할당량이 점진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유상할당 확대로 실제 현금 부담이 늘어날 것이다. 국제 연계로 글로벌 탄소 가격과 수렴할 가능성도 있다.


하락 요인들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력 부문 배출량이 감소할 것이다. 에너지 효율 개선으로 전반적인 배출량 증가세가 둔화될 것이다. 경기 둔화 시 산업 활동 위축으로 수요가 감소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의 전망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한다. 2030년까지는 최소 5만원, 많게는 10만원까지도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정책 변화, 경기 상황 등에 따라 등락을 반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 너머의 의미

배출권 가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 경제가 탄소중립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가격이 오르면 기업들은 감축에 더 많이 투자한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산업 구조가 바뀐다. 가격이 내리면 감축 유인이 약해진다.


탄소 가격은 경제 전환의 속도계다.


적정한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너무 높으면 기업들이 부담을 느끼고, 너무 낮으면 감축 유인이 없어진다.


다음 이야기

다음에는 기업 실무진들을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를 준비하려 한다. 배출권을 언제 사고팔아야 하는지, 어떻게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지, 실전에서 바로 쓸 수 있는 노하우들을.


이론도 중요하지만, 결국 실전이 더 중요하다. 탄소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무 지식을 공유해보자.

가격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시장의 기대, 정책의 방향, 미래의 가능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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