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3개를 겨우겨우 생각해 내며 적어 내려 간 버킷리스트는 어느새 102번째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고 있다. 제이는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리스트가 끝없이 늘어나는 본인이 신기했다. 2시간을 달려 3시간짜리 특강을 듣고 돌아오는 길 잠시 중간 휴게소에서 다시금 리스트를 확인해 보며 오늘 새롭게 추가된 리스트를 적어 넣는 제이였다.
불과 몇 년 전 공황장애로 사람들 속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과호흡이 오고 광장에서 기절을 할 만큼 대인기피증과 광장공포증이 심했던 그녀였다.
그걸 극복하고자 시작한 작은 도전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삶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다시금 일어서게 하는 시크릿 키처럼 작용되어 갔다. 극한으로 몰아치고 바닥까지 떨어지고를 반복하며 조금씩 중간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이런 패턴이 그녀의 삶의 방식처럼 정착되어 가는 듯했다.
힘들어도 견뎌내면 다음이 오고 또 내일이 오는 반복되는 일상이 그녀에겐 죽을 듯이 힘들었던 일들도 그렇게 버텨내 진다는 것을 배워가게 했다.
수첩을 덮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문득 주변 풍경이 좋아 잠시 더 머물기로 했다. 혼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리 오래 머문 적도 처음이라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밤길 운전에 고생을 할 터였지만 해 질 녘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예쁜 자줏빛 노을을 두고 출발하기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이는 아쉬운 대로 휴대폰을 꺼내 연신 나중에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은 풍경들을 이리저리 찍어대고는 수첩을 다시 펼쳐든다.
한 줄을 더 추가로 적어내려 간다.
103번째 리스트, '수채화로 풍경화 그리기'
제이는 어릴 때부터 기계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부수고 고치고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밤새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뜬눈으로 추리소설을 읽어대는 것도 좋아했다.
어줍잖은 유치한 감성으로 자작시를 적는 것도 좋아했고 동네 친구들과 건물사이를 타고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놀이도 좋아했다.
제이는 그런 아이였다. 싫어하는 것 빼곤 다 좋아하는 것 투성이인 호기심 천국 그 자체인 아이였다.
어찌 보면 그런 사람이 사춘기 시절 많은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그 많은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잊을 만큼 지독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와 봇물 터지듯 터지는 것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이는 그간의 시간과 공백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시간을 쪼개 이것저것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 새롭게 등장한 기술에 대해 배우고, 시스템을 배우고, 커피를 배우고, 그림을 배웠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편집하고 새로운 외국어를 배웠다.
목공을 배우고 클라이밍을 도전했다.
무언가를 위한 목표를 세워둔 배움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매 순간 그녀는 너무나 즐거운 얼굴로 눈빛이 반짝반짝 살아있었다.
그녀에게는 배움이라는 과정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그녀에게 '쉼'이란 곧 배움으로 채워 넣는 것을 통해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취미는, 새로운 취미를 만든 것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몇 년을 학대에 가까운 스케줄로 취미라는 이름을 붙여 무작위 배움을 밀어 넣어댔다. 무엇을 위한, 어떤 성취를 달성하겠다는 목적 같은 것은 없는 그저 배움이라는 행위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위안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독려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지독한 학대자이자, 유일무이한 서포터였다. 누구보다 강하게 채찍질하지만 누구보다 깊이 진심으로 응원했던 자신을 그녀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해했다.
그녀는 배움에 대한 갈증이, 취미에 집착했던 마음이 '공허함'과 '외로움'에서부터 온 마음의 결여에서 시작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제야 외로웠던 아빠를, 힘겨웠을 엄마를 두 분의 행동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내면을 조금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취미는 제이에게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알아달라는 외침이었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달라는 간절함이었다.
그렇게 외면했던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몰랐던 어린 시절의 제이는 그저 그렇게 또 많은 시간을 그저 배우고 또 배우고 새로운 버킷리스트를 채워가며 시간을 보냈다.
수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의 제이 덕분에 다양하고도 많은 경험들이 쌓인 지금의 그녀는 그 경험들에서 배운 인사이트들과 연결고리들을 묶고 이어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의 그녀가 지금의 그녀에게 선물을 해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가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살아낸 현재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여전히 불안하고 가슴한쪽 불안감이 늘 엄습하는 제이이지만 과거의 그녀가 미친 듯 시간을 쪼개 무언가를 열심히 배워둔 덕에 그녀의 경험창고는 실패의 경험들이 가득한 실패창고와 작은 성취의 경험들이 쌓여있는 성공창고들로 많이 채워졌다. 그리고 지금의 제이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하루들이 수년 후의 그녀에게 또 많은 경험들을 엮어 또 다른 형태의 그녀만의 창고를 채워주게 될 것임을 안다.
그래서 제이는 오늘도 새로운 경험을 하나 추가해 넣는다.
미래의 그녀가 어떤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며 조금은 결이 비슷한 방향성을 가진 경험들을 쌓아가며, 조금은 먼 미래의 그녀가 이뤄줄 버킷리스트를 한 줄 더 추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