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주는 포만감이 좋았고 무겁지 않은 포만감뒤에 따라오는 알딸한 느낌의 가볍게 격앙된 감정이 좋았다.
작은 것에도 크게 웃음이 나고 사소한 것에도 크게 공감하게 되는 감정상태는 제이에게 늘 싫지 않은 설렘을 주곤 했다.
어렸을 적 제이의 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하셨다. 몸이 약하셔 술을 많이 마시지도 못하시면서 술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런 아버지에게는 조금은 특이한 루틴이 있었는데 늘 퇴근 후 술집에 들러 한병의 술을 시키고는 딱 한잔만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여러 술집들을 들러 그렇게 한잔씩 결국은 한 병 이상의 술을 드신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한자리에서 한 병을 마시면 훨씬 저렴하게 기분 좋게 마시고 들어올 수 있을 텐데 왜 그리 시간도 돈도 많이 들어가는 행동들을 하시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 10대 때 아버지에게 술을 배웠다. 가끔 아버지는 제이를 앉혀두고 주도에 관해 긴 이야기를 하셨다. 술은 이렇게 마셔야 하고 술은 이럴 때 마셔야 하고 술이 이렇고 저렇고.
어린 제이는 그 말들이 그저 귀찮은 잔소리처럼 들렸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한 번 두 번 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어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밌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외항선을 타시며 세계를 도셨는데 몇 년에 한 번씩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양손 가득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국의 새로운 것들을 잔뜩 안고 돌아오셨다. 그래서인지 제이의 집에는 신기한 돌들과 장식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느 아버지들보다 외국의 여러 문화를 접하며 자유로움을 가슴으로 느껴왔던 아버지의 외로움이, 쓸쓸함이 한잔의 술을 핑계로 여기저기 헤매게 한건 아니었을까 싶다. 제이는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조금 이해하며 가끔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런 아버지와의 술에 대한 추억이 있어서였는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사고 이후엔 술을 입에도 댈 수 없게 되었다. 대학을 입학하고 한창 술자리가 많은 신입생 때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하는 제이를 보고 수군거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쇼를 한다는 둥, 내숭을 떤다는 둥 등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는 제이의 강박을 더 크게 자극했고 어느 순간 카페인이 들어간 그 어느 것도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커피도, 콜라도 카페인이 들은 것을 마시면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어 제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점점 싫어졌다. 그렇게 점점 구석으로 자리 잡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시간들이 길어졌다.
그렇게 대학 2년여를 보낸 어느 여름, 어린 시절 친했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학에서 작은 포차이벤트를 기획했는데 와서 자리 좀 채워달라는 말에 마지못해 억지로 참석을 했다. 그리고 친구는 준비한 시음이벤트를 사전 테스트 해야 한다며 도와달라 했고 술을 마시지 못했던 제이에겐 향을 맡으며 혀끝만 살짝 대보라고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준비된 여러 잔의 맥주를 테스팅 베드에 올렸다. 그렇게 맡아본 작은 잔의 맥주들은 신기하게도 미세한 향의 차이와 맛의 차이를 보였다. 어떤 것은 살짝 시큼하고 청량감이 과해 과일 주스 같은 느낌을 주고 어떤 것은 부드러운 우유와 버터를 탄 듯 고소한 향이 감돌고 또 어떤 것은 마치 과하게 로스팅된 커피를 베이스로 한마냥 탄내가 나기도 했다.
홀린 듯이 향을 맡고 입으로 가져가던 제이는 어느덧 목구멍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 넘김에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