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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May 22. 2020

빠르면 뭐해, 다 놓쳐버리고 마는 걸

올레길 이야기 | #제주걷기 #올레길10-1코스 #가파도청보리



모슬포항에서 5.5km 떨어져 있는 가오리 형태의 섬. 가장 높은 지점의 높이가 20.5m로 우리나라 유인도 중에서 가장 낮아 어디서든 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관광을 한다기보다 여유를 즐긴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곳. 아름다운 섬, 가파도다. 올레길은 나지막한 평지로 이루어져 쉬엄쉬엄 걷기에 좋고, 중간 스탬프가 없이 시작과 끝 지점 스탬프 2개만 있을 만큼 길이가 짧다. 걷는 길이 험하다거나 길이가 너무 길지도 않아 누구든 걱정 없이 걸을 수 있는 코스라지만, 우리에겐 해결되지 않은 불안 요소가 하나 남아있었다. 하루 묵는 것이 아닌 당일치기 여행으로 제주 본섬과 가파도를 하루 내에 오가야 하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제주올레에 의하면 가파도 올레길을 걷는데 소요되는 예상 시간은 넉넉하게 2시간. 문제는 가파도의 경우, 우도와는 다르게 섬으로 들어가고 본섬으로 나오는 시간을 내 마음대로 고를 수가 없다. 가파도로 가는 배편을 끊을 때 본섬으로 오는 배편까지 왕복으로 끊도록 되어있으며, 돌아오는 배 시간은 제주에서 출발하는 배 시간을 언제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해진다. 우리는 11시에 가파도로 출발하니까 돌아오는 배편 출발 시간은 3시간 20분 뒤인 14시 20분이었다. (오전 9시와 10시, 오후 2시 출발은 2시간 20분 뒤 / 11시 & 12시 출발은 3시간 20분 뒤 / 오후 3시와 4시는 왕복 매표 불가)  천천히 걸으며 가파도를 둘러보고 맛집을 찾아 여유롭게 음미한 뒤 디저트까지 챙기기에 3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 그래도 일단 한번 가보는 수밖에. 그리 어렵지 않은 평탄한 길로 이루어진 올레길이라고 하니, 빠르게 움직이면 되겠지. 언제나 그랬듯 못 먹어도 고! 를 외쳤다.


 



승선권에 일반실 좌석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앉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쾌속정이 아닌 데다 가파도까지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기에, 갑판 위에서 바다를 구경하며 서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저 멀리 푸른 들판이 훤히 보이는 작은 섬, 가파도에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말 낮은 섬이구나. 수평선과 하나가 될 것처럼 모든 것이 나지막하게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날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손으로 잡고 있어야 할 만큼 바람이 꽤 불긴 했지만, 가파도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쾌청했고 햇볕도 적당히 따뜻했다. 도착해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우도에서도 그러하듯 여객터미널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자전거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큰일이었다. 연애 초반부터 2인 자전거 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내 앞에 시간 무제한의 자전거 대여가 나타났으니. 나의 애절한 눈빛을 읽은 그. 자전거로 빠르게 한 바퀴 돌아보고 걸까? 먼저 말해주었고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나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은 날, 자전거까지 마주하니 내가 올레꾼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저 멀리 살짝 튀어나와있는 돌처럼 보이는 것이 마라도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제주도와 산방산의 모습.



초반에는 그저 재밌기만 했다. 깔깔깔 숨이 넘어갈 듯 쉼 없이 웃었고 꿈만 꾸던 2인용 자전거를 드디어 타보는구나 싶어 기분도 날아갈 듯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SNS 알림이 울리면서 켜진 핸드폰에 나타나 있는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시간은 올레꾼이었던 나를 다시 불러내었기에.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전거로 한 바퀴 돌고 나면 걸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니야. 지금 즐거우니까 걱정은 하지 말자. 오늘은 자전거 타고 다음에 한번 더 오면 되지 뭐. 하며 쿨하게 넘기려다가도, 제주살이 하는 동안 우리가 여기를 다시 오게 될까? 찝찝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더욱이 자전거를 타며 가파도 풍경을 즐기는 것도 그리 여의치만은 않았다. 아름다운 가파도 청보리 밭을 배경으로 그와의 사진을 남기고 싶어 고심하며 고른 치마가 자전거를 타니 엄청난 방해 요소가 되어버린 탓이다. 발목까지 오는 긴 기장이었음에도 자꾸만 불어오는 바람에 벌러덩 뒤집어질 것만 같아 불안해서 치마를 붙잡느라, 안 그래도 빠른 속도 때문에 못 보는 풍경인데 그마저도 놓쳐버리고 말았다. 걱정스러움이 커지는 만큼 자전거에 대한 흥미는 빠르게 떨어져 갔고, 자전거 타는 것(치마 간수 포함)에 정신과 체력을 쏟아부을수록 내 말 수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잠시 자전거를 세웠다. 마라도에 대한 안내판 간세가 놓여있는 곳에 서서 저 멀리에 조그맣게 보이는 마라도 사진을 찍고, 삼각대를 꺼내 우리 둘만의 기념사진도 하나 남겼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불편한 마음에 대해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둘이서 자전거 타보고 싶었고 드디어 타게 되어서 너무 좋은데, 가파도를 걸으며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자꾸만 걱정이 된다고. 매일 꼬닥꼬닥 걸으며 주변 경관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 또 보며 여행을 했던 우리였는데. 자전거로 이동하니,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려 놓치는 것들이 태반인 걸. 두 발이 아닌 다른 이동수단으로 가파도를 한 바퀴 돌아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는 있겠지만 놓쳐버리는 것이 너무 많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언제나 그랬듯, 나의 마음을 말했고 그의 마음을 물었다.


결국, 우리는 무제한 자전거 대여를 한 보람도 없이 빨리 반납해버렸다. 나의 의견에 그도 동의해주었고 우리는 걷기를 택했기에. 자전거로는 순식간이었던 거리를 한참이 걸려 지나면서도 가파도의 작고 큰 풍경들이 내 곁을 완전히 지나칠 때까지 곱씹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다. 그제야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고, 휴식이 시작되었다.


거기에 더해진 행복 하나. 가파도 핫도그가 내 손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가파도의 명물이라길래. 초록 들판 위에 빨간 지붕 그리고 '핫도그'라고 적혀 있는 그 간판이 너무나 정직했기에.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고 그에게 두런두런 핫도그를 먹어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동시에,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만 돌고 있었다면 골목에 있는 이 가게를 과연 발견할 수 있었을까? 우린 역시 걸어야 했던 거야. 혹시나 자전거를 일찍 반납한 것에 아쉬움이 남을까 하는 마음에 운명론까지 들먹이며 우리의 선택이 잘한 것임을 그에게 자꾸만 새뇌시켰다. 비로소 핫도그 한 입. 입안 가득 베어 물자, 세상은 한층 더 아름다워졌고 내 마음은 더욱 평온해졌다.





제주 본섬과 한라산 그리고 마라도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소망 전망대로 가는 언덕길에 들어섰다. 가파도에서 제일 높은 오르막이 아닐까 싶은, 그럼에도 아주 완만하고 짧은 언덕을 오르자 명성이 자자한 가파도 청보리밭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8만여 평이라는 것을 글자로 읽었을 때는 그저 넓은가 보다 짐작만 했는데, 실제 그 규모를 두 눈으로 보니 18만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 제주 본섬에서 이따금 청보리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청보리를 보기 위해 많은 여행객들이 가파도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어디에 있는 청보리 밭도, 가파도 앞에서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만큼 경이로운 풍경이다.


매년 3월 초부터 5월 초순, 봄이 되면 우리나라 최남단인 가파도에서 제일 먼저, 가장 높게 자라는 청보리. (제주 향토 품종인 '향맥'으로 다른 지역 보리보다 2배 이상 높게 자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바람에 의해 새하얀 파도를 만들어내듯, 가파도의 드넓은 청보리는 살랑이는 바람에 초록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푸른 청보리가 선선한 바람에 하늘하늘 날리고, 따뜻한 햇볕에 끝이 반짝 빛나며 실크를 손으로 쓸어내리듯 그려지는 부드러운 표면. 세차게 바람이 불어올 때면 청보리의 가냘픈 몸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빼곡하게 심긴 탓에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사라락 사라락 기분 좋은 소리를 들려준다. 드넓은 밭에 수많은 청보리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모든 말과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보다 좋은 ASMR이 있을까, 각자 조금씩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각자의 핸드폰을 꺼내 청보리의 소리와 그곳의 푸른 물결을 영상으로 담아보기도 했다.

 




평균적으로 한 시간에 4km~5km를 걷는 우리인데, 너무 마음에 드는 풍경은 가만히 멈춰보기도 하고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며 한참의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는터라. 역시나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누리기엔 촉박한 시간이었다. 엄청난 양의 해물짬뽕을 20분 만에 흡입하고 허겁지겁 뛰어 터미널까지 가야 할 만큼. 하지만 돌아가는 배안에서도, 돌아온 뒤에도 자전거를 포기하고 걷기를 선택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아무리 짧고 부족하더라도. 그 시간 안에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다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지나간 곳들만큼은 놓치는 것 없이 두 눈에, 마음에 충분히 채워왔으니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천천히 걸으며 나아가는 걸음마다 보이는 가파도의 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아놓았으니. 다시 오면 자전거로 신나게 달리며 걸을 때와는 또 다른 풍경들을 마음 편하게 즐겨야지. 가파도의 청보리가 새로운 한 해의 싱그러운 봄소식을 전하는 또 다른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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