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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Jul 17. 2020

완주를 포기하고 집으로 가기를 택했다

올레길 이야기│#올레길19코스 #몸살 #포기



 한 코스를 걷기 시작했다면, 꼭 그 끝을 보았다. 항상 그래 왔다. 처음 1&2코스를 묶어서 30km가 넘는 거리를 걸었을 때도, 역풍을 뚫고 20km의 거리를 걸으면서도. 완주 스탬프를 찍고서야 넉다운이 되었다. 그런 우리가 오늘은 코스의 끝을 보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집으로 가기를 택했다. 처음으로 포기를 외쳤다.






 연달아 3일을 걸었다. 오늘이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3일간의 컨디션은 좋았다 나쁘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날씨의 영향이 컸다. 어떤 날은 엄청 습했다가, 또 어떤 날은 너무 뙤약볕이라 건조했다가 다른 날은 적당히 흐리고 바람 부는 선선한 날씨였다. 날씨의 변화에 몸이 적응을 못해 탈이 난 것일까. 평소라면 아침잠이 조금 부족할지라도, 숙소에서 첫 시작점으로 가는 차 안에서 5분 쪽잠이면 금방 일어나 기운을 차리던 나인데. 오늘은 40분가량의 거리를 이동하는 내내 잠에 빠졌고 그럼에도 개운치가 않았다. 이것이 몸이 휴식을 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임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잠이 많이 부족했나 보다. 그냥 무시해버렸다. 제주에서 지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올레길 완주를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할 코스는 아직 남아있기에. 이번 주는 5일 연속 걷기를 감수하려 했다. 완주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걸어내야만 한다고 나를 다그쳤다. 그래야 모든 코스를 완주를 한 뒤, 제주에서의 마지막 한주를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앞으로 약 5시간, 19km는 더 걸어야 하는데. 걷기 시작할 때부터 눈덩이는 돌처럼 무거웠고 다리는 땡땡하게 굳어갔다. 1km가 되기 전에 이미 알았다. 오늘은 이제까지 보다 훨씬 더 고될 것이라는 걸. 그때부터였다. 혼자 마음속으로 고민을 시작한 것이. 포기할까. 집에 가자고 할까. 그래도 될까. 계속된 혼자만의 고민 끝에 그에게 물었다. “중간지점은 어디야? 그럼 우리 얼마나 남은 거지?” 진담이지만 농담인 듯, "집에 갈까?" 툭 한마디 던지고는 장난이라는 듯이 혼자 하하하 웃어버리기도 했다. 몸이 무거운 증상은 기본이었고 산소가 부족해서인지(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산소가 부족할 시 하품이 나온다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하품에 이어, 지독한 눈 시림 때문에 눈물이 계속 흐르다 못해 코에서는 콧물이 쉴 새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필 곶자왈을 넘어가던 때였다. 이때까지는 버틸만한 정도였는지. "설마 곶자왈 트라우마인가?" 하며 그와 장난을 치기도 했다. (곶자왈 트라우마는 올레길 14-1코스 글 참고) 몸이 안 좋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오는데, 나는 그 모든 이상증세를 모조리 무시하고 있었다.


 참고 이겨내며 악으로 깡으로 걷다 보니, 어찌어찌 6km 지점 동복리 마을운동장에 도착했고, 시작 지점부터 2시간을 버텨 중간 스탬프를 기어코 찍어냈다. 도장은 얻었지만 낯빛을 잃어버린 나. 창백해진 얼굴과 굳어가는 표정을 본 그가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계속 걸어도 괜찮겠어?”라고 물어올 만큼 상태가 악화되어갔다. 아무래도 몸살에 단단히 걸린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완주는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었으니, 잠시 쉬면서 밥을 먹고 출발하면 괜찮을 거라고 그를(어쩌면 나 자신을) 안심시켰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걸어보자며 계속 걷기를 택했다. 다시 걸을 것이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이 또다시 신호를 보내왔다. 내 말을 알아듣고 반응하는 것인지 의심될 만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잠시 멎었던 콧물이 다시 주룩주룩 물처럼 흐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아래 입술색이 가장자리부터 파래져갔다. "아무래도 몸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계속 걸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집에서 가져온 훈제 계란을 점심으로 먹는 와중에(그 와중에 맛있고 난리), 마주 보고 앉아있던 그가 점점 어두워져 가는 내 입술을 보고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제주 올레길을 걷기로 한 것은 오롯이 우리의 선택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다. 올레길 26코스 425km를 꼭 완주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제주의 풍경을 보고 더 많은 것들을 느끼려고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던 우리였고, 걷는 걸음마다 달라지는  풍경들이 주는 감동과 그 모습들을 보는 재미로 걸어왔는데. 오늘의 나는 왜 내 몸을 이리도 혹사시키며 의무처럼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정작 몸이 힘들어 서 내 몸상태를 지켜보느라, '언제쯤 중간 스탬프 지점이 되려나? 얼마나 있어야 도착할까?'라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풍경에 대한 감상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코스는 몰라도, 오늘 19코스를 걸었던 2시간 동안에는 올레길을 걷기로 했던 이유도, 의미도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끝없던 고민의 결정은 너무도 쉬워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걸어도 괜찮을까?"


 나는 쉼을 택했다. 지금 상태로 더 걷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기에. 그저 걷기 운동에 불과했다. 다 내려놓고 뒤돌아서는 걸음. 왜인지 가볍게 느껴졌다. 어깨와 두 다리를 짓누르던 강박을 내려놓아서일까.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완주를 한 것도 아닌데. 내가 포기를 택했다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기분 좋았다.


 끊임없이 나를 걱정하던 그는 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당연히 괜찮지. 잘 생각했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조차 아직 정답인지 모르겠는 선택에 힘을 실어주는 그의 말이 마치 '오구오구 포기도 할 줄 알아'라고 하는 느낌이었달까. 그의 답을 듣고 나니 괜스레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아이처럼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2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아닌 안도의 표정이 가득했다. 걸음을 멈추기로 한 다음부터 조금씩 나아져가는 내 상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4일간의 연속된 걸음에 아마 그도 꽤나 힘에 부쳤을 테다. 나에게는 물론, 그에게도 쉼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한 코스를 모두 완주한 것처럼 밝은 톤으로 시원-하게 외쳤다. "포기!"





 언제나 이놈의 쓰잘 떼기 없는 못난 승부욕이 문제다. 적당히가 안되고 늘 선을 넘어 나의 평온한 일상에 스트레스를 만들고 병을 키우고야 말지. '포기할 땐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내 삶과 자신을 스스로 더 사랑하고 아끼기 위해 시작한 일들인 만큼 내 몸을 혹사시키며 죽어라 달려들기보다는 즐기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옳다.' 달리기에 빠져 취미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늘 되새기는 말들이다.


집으로 가는 차 안, 조수석에 앉아있는 내 다리 위에 따뜻한 떡볶이가 한 아름 올려져 있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몸에 에너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들의 끝에, 탄수화물 보충이라는 미끼가 던져졌다. 떡볶이는 내가 그의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결과다. 훌쩍대던 콧물도 잦아드는 듯하고 입술도 원래의 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멈추고 쉬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라 믿고 있지만, 혹시 모른다. 쉼을 부르는 신호가 아니라, 탄수화물을 부르는 신호를 보낸 몸뚱이의 큰 크림이 제대로 먹힌 걸지도. 그렇다 할지라도 이번은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황소고집 승부욕의 못난 주인을 만나 고생했으니. 오늘만큼은 올레길 완주에 대한 강박 따위 버려버리고 몸뚱이에게 치즈 토핑 가득 올려진 떡볶이와 기약 없는 숙면을 보상으로 주어야겠다.




<한 달이라도 좋아요 미스 제주댁> 은 브런치에서 글·사진으로, 유튜브에서 영상으로 제작됩니다. 영상이 궁금하시다면 놀러 오세요 :-> https://youtu.be/akxZ4gxxz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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