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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Jul 14. 2020

下는 생각보다 上이고 上은 생각보다 中이다

올레길 이야기│#올레길9코스 #박수기정 #월라봉



종점 스탬프를 향해 걸어가는 길. 짧은 코스의 길이도, 인생 샷을 건질 수 있었던 멋진 포토스폿도, 지루하지 않게 적당한 경사의 오르막과 평탄한 길이 섞여있는 것도, 이따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풍경들까지도. 9코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며 오늘 걸음에 대한 감상을 나누던 그와 나. 난이도 상(上)인 9코스에 대한 감상은 자연스레 이제까지 걸었던 난이도 하(下) 코스들과의 비교로 이어졌다. '난이도 하'라는 말에 속아 마음을 편히 먹고서 시작한 코스는 힘들었던 기억만으로 가득한데. 오늘처럼 어려울 것이라 지레 겁을 먹었던 '난이도 상'의 코스들은 늘 생각보다 괜찮았고, 너무 좋다고 감탄하며 상쾌하게 마무리하는 우리. 참, 아이러니해. 그렇지?








제주올레에서 만든 올레길은 상중하의 난이도로 나뉘어 있다. 상(上)은 26개 코스 중 총 4개. 어려운 난이도의 코스는 날씨가 좋은 날 걸으려 미루고 미뤄왔었는데. 드디어, 강풍주의보가 울릴 만큼 강한 바람이 휩쓸고 간 제주에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쾌청한 날씨가 찾아왔다. 햇볕은 강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고, 하얗고 이쁜 구름이 드문드문 떠다니는 밝은 하늘. 걷기에 이보다 완벽한 날씨가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난이도 상'의 9코스를 걸어보자!

 

시작 스탬프를 찍고 대평포구에서 걷기를 시작한 시간은 오후 12시 반. 평소보다 많이 늦어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이었지만,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불태울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9코스는 박수기정과 월라봉이 주를 이루는 코스로, 대부분 숲길인 데다 길이도 6.7km로 비교적 짧은 코스이기에. 우리의 평소 페이스로 예상해보았을 때, 오래 걸려도 오후 4시 전에는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난이도 상(上)이라고 표기되어있기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한가득 있었지만.


대평포구에서 박수기정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되는 9코스. 경사진 길을 오르며 종아리가 당기고 무거운 느낌을 받기는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다. 절벽이라는 뜻의 '기정'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에 비하면 꽤나 완만하고 오르막이 길지 않아 금방 끝나기 때문이다.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박수기정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의 아름다움 때문일 테다. 박수기정을 오르며 나무와 수풀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대평 마을의 모습과 쪽빛의 바다, 산방산의 풍경이 자꾸만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숨이 가빠오려 할 때 멈춰 서서 사진 찍고, 오르막이다 싶으면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또 한 번 쉬어갈 수밖에 없으니. 그야말로 쉬멍 걸으멍 오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박수기정이다.



박수기정을 오르며 나무와 숲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대평마을과 바다의 풍경



걷기 시작한 지 30분쯤 되었을까. 우리의 왼편, 박수기정의 절벽 끝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 하나를 발견한 그가 소리쳤다. “이거다!” 여기가 바로 9코스의 하이라이트이자, 많은 이들이 올레길 인증샷을 남기는 훌륭한 사진 스폿이다. 바위 뒤편으로 펼쳐지는 산방산과 대평 마을, 멀리까지 뻗어있는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멋들어진 배경을 만들어준다. 걷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SNS에 올려둔 사진을 보며 '우리도 여기서 꼭 사진 찍어보자!'하고 다짐했지만, 하마터면 모른 채 지나칠 뻔했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가파른 경사를 한참 올라간 뒤 산 꼭대기에서 찍은 듯해 보였기에. 시작한 지 고작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이 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탓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인생 샷을 잔뜩 남긴 뒤, 볼레낭길을 따라 걷다 봉수대를 지나면 이번 코스의 가장 큰 난관, 월라봉이다. 이곳 역시, 안내서에 적힌 난이도 상(上) 표식에 너무 겁을 먹지 않아도 된다. (역방향으로 걸었다면, 말은 달라진다) 박수기정을 올라온 것만큼만 올라가면 금세 내리막이 펼쳐질 테니. 물론 오르는 동안 가파른 구간도 있고 좁은 숲길이 나오지만, 험한 길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고 잠시 지나가는 구간일 뿐이다.



박수기정 포토스폿에서 산방산 찍기
박수기정 포토스폿에서 바라본 산방산의 풍경



틈틈이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내 앞에서 앞장서 걸어가던 그가 오른편의 진지동굴을 보더니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자리에 멈춰 섰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 모습에 키득키득 웃으며 무슨 일인지 궁금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그를 쫓아가 보았다. "엄마야!!" 그를 보며 큭큭 웃었던 내가 더 크게 놀라버렸다. 구석진 동굴 안 어두컴컴한 곳에 대포같이 생긴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가만히 바깥쪽을 향해 서 있는 한 사람.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갔음에도 그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진지동굴 안에 총을 겨누듯 대포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라니. 그보다 내가 먼저 그 모습을 맞닥뜨렸다면, 진짜 총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 분명했다.


제주 올레길에 포함된 오름을 걷다 보면 이따금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놓은 진지동굴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월라봉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당시, 일본이 화순항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7개의 방어진지를 이곳에 구축했다. 일제강점기 전쟁유적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들로, 잊지 말아야 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의 월라봉 진지동굴은 역사교육의 장인 동시에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사진 스폿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진지동굴 속에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어르신 올레꾼이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우리 때문에 겸연쩍었는지, 동굴에서 조심스레 나오시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월라봉 진지동굴이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사진 스폿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작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게 동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한번 찍어보라고 권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까지 하며 동굴 입구를 감싸고 있는 초록빛 나뭇잎의 형태가 잘 드러나도록 어두운 동굴 안에서 바깥 풍경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전문적인 카메라 기술을 전혀 장착하지 않은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 우리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한 장씩의 사진을 찍고 그 분과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던 모습에 놀란 서로를 떠올리며 어찌나 웃었는지. 그분을 만난 덕분에 중간 스탬프로 가는 길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올라봉 진지동굴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본 사진
올라봉 진지동굴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어느새 중간 스탬프 간세가 있는 창고천 다리에 도착했다. 이곳을 통과했다면, 완주 1km 정도 남은 것이다. 오후 4시쯤 도착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넋을 놓게 하는 풍경에 빠져 한참을 멈춰 서서 사진과 영상을 찍고, 절벽 바위에서 인생 샷을 건지고 대포 카메라 때문에 웃으며 쉬엄쉬엄 왔음에도 종점 스탬프 간세가 있는 화순금모래 해수욕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이따금 숨이 가빠오는 가파른 경사를 올랐지만, 높은 지형에서 내려다본 풍광의 아름다움이 더욱 커서 그 전의 힘든 기억을 싹 지워버린 걸까. 아니면 박수기정과 월라봉의 곳곳에서 맞닥뜨린 숨은 명소들에 시선을 빼앗겨 시간이 빨리 흘러버린 탓일까. 난이도 상(上)의 9코스는 또 한 번 걸어보고 싶을 만큼 좋았고, 지레 겁을 먹은 것이 아까울 만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난이도 하(下) 코스들보다 훨씬 좋은데? 우리 난이도 상(上)부터 쫙 돌까?” 괜히 큰소리치며 장난스레 말을 던졌다. 다음 상(上) 코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 한 채.



  



* 제주올레 가이드북에 표기되어있는 코스 길이와 다르다. 지금 9코스의 길이는 6.7km며 제주올레 공식 홈페이지에 보면 변경된 코스를 확인할 수 있다. 중간 스탬프 지점도 다르니, 가기 전에 꼭 참고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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