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이야기│#제주올레길걷기 #올레길11코스 #모슬봉
올레길을 걸으며 알게 된 것들 중 하나, 매년 5월 말은 마늘 수확기라는 것이다. 11코스는 대정읍을 지나게 되어있는데, 대정마늘이 유명하다는 것 역시 이번 올레길을 걸으며 알게 되었다. 동네의 특산물인 만큼 다른 코스에 비해 유독 마늘밭을 많이 볼 수 있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걷는 내내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완주 스탬프를 찍은 뒤,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마늘 트럭을 몇 대나 보았는지 모른다. 한 트럭 당 마늘이 한가득 담긴 빨간 그물망 수십 개가 실려있었다. 그 양만으로도 제주 대정마늘이 유명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간 여러 올레길 코스를 걸으면서 마늘이 밭에 심겨 있는 모습, 뽑아져 있는 모습, 마늘대와 알맹이가 분리되어있는 모습 등의 수확 과정을 이따금 보곤 했는데. 5월 말, 11코스를 걸으며 드디어 마늘 농사 대장정의 끝, 화려한 피날레를 본 것이다.
수확 시기에 운이 좋으면 잘 익은 대정 마늘을 얻을 수도 있다. 11코스를 걸으면서도 올레꾼으로 보이는 분들이 수확이 끝난 밭에서 드문드문 남아있는 알맹이들을 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른들께 스치듯 들은 것도 같았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마늘은 포장하지 않고 남겨둔 채 동네 사람들이나 올레꾼에게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시는 분들도 이따금 있다고. 아쉽게도 그 기회가 우리에게까지 오진 않았다.
나 마늘 엄청 좋아하는데.
올레길 메이트인 그는 어린 시절 어렴풋이 마늘대에서 알맹이를 떼는 작업을 하시던 외할머니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리 큰 도시에 살지 않았음에도 동네를 지나면서 혹은 체험 학습으로 어떠한 농작물의 재배 및 수확 과정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꼬꼬마인 나에게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지도) 서른이 넘어 제주에서 처음으로 농촌 체험 학습을 하게 된 것이다. 어릴 때 보았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뛰어놀기만 했을 풍경들. 서른둘의 체험 학습은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했다. 마늘을 망에 넣는 기구도, 마늘대와 알맹이를 분리하는 작업 방식도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모든 것이 궁금했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동네 어르신들을 어지간히 귀찮게 했을 테다. 이 기구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마늘대는 그냥 버리는 건가요? 망에 넣지 않는 알갱이는 못 먹는 거예요? 등등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는데. 직접 물어보는 대신 마늘밭을 마주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있는 농작물의 모습들, 작업하시는 과정들을 조심스레 카메라에 담아왔다. 밭에 줄지어 있는 마늘대, 흩트러져 있는 토실토실 알맹이들, 마늘을 가득 담아 꽉 동여맨 빨간 그물망들이 너른 밭 곳곳에 우뚝 서 있는 모습까지. 매일 식탁에 오르는 평범한 마늘인데. 제주에서 보아서일까. 괜스레 더 특별한 듯했고 심지어 그 모습이 이뻐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사진을 찍어댔는지. 사진첩의 마늘 사진만 모아도 백장은 거뜬히 넘기지 않을까 싶다.
대정마늘로 유명한 제주도 대정읍.
5월은 마늘을 수확하는 시기.
이 두 가지는 꽤 오랜 기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2살 경상도 시골 청년 철수는 제주도 모슬포 공군기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모델처럼 키가 크고 어여쁜 외모로 인기가 많던 동갑내기 여자 친구 영희를 육지에 두고 입대한 철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육지와 섬으로 떨어져 그 둘은 얼마나 그립고 애틋했을까. 당시 22살이었던 영희, 그를 보기 위해 바다를 건너 모슬포로 갈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번뿐이었다. 나란히 서있는 모습에서 쑥스러운 듯, 설렘이 가득 느껴지는 철수와 영희의 모습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빠, 내 제주도 간데이”
“모슬포 가나? 아빠가 거기 있었다 아이가”
이야기 속 철수와 영희, 두 사람은 나의 아빠와 엄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아빠는 모슬포 공군기지에서 군생활을 했다. 아빠와의 이야기 중에 제주라는 단어가 나오면 언제든 어디서든 연관 검색어처럼 모슬포가 따라붙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올레길을 걸으며 태어나 처음 모슬포에 갔고 모슬봉을 올랐던 나는, 그곳의 풍경은 낯설었지만 무언가 익숙하고 친근했다.
모슬봉 위쪽에는 군사기지가 있다. 그곳을 걸어서 지나갈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우리 아빠가 군 복무했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늘 모슬포에 있었다는 말만 들었던 터라, 그저 모슬포 외곽 어딘가에 군부대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기에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산 꼭대기에 있을 줄이야. 모슬포와 모슬봉을 다 지나고 종점 스탬프를 찍고 난 뒤, 출발 지점에 주차해둔 차로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 아저씨의 친절한 동네 설명을 듣다 “저기 위에 있는 동그랗게 솟아 있는 기둥이랑 건물 보이죠? 공군기지예요. 올레길 걸었으면 지나왔겠네”라는 말을 듣고서야 알아챘다. "어! 저희 아버지 공군이셨는데, 그럼 군복무 하셨던 곳이 저긴가 봐요!"
40년 전 22살의 아빠가 군 생활했던 그곳을, 연인이었던 22살의 아가씨 엄마와 아빠가 함께 손잡고 걸었을 어딘가를 내가 그와 걸은 건가? 상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의 나보다 10살이나 어리고 이뻤던 엄마와 지금 내 옆의 그보다 더 멋지고 늠름했을 아빠. 우리 넷 사이에는 40여 년의 세월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엄마 아빠와 지금의 우리가 함께 걷는 묘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뭉클함과 뿌듯함이 가득 몰려와 코 끝이 시큰했다.
늘 모슬포 노래를 부르는 우리 아빠와 올레길 11코스, 적어도 모슬봉만큼은 꼭 손잡고 걸어봐야겠다. 그간 듣지 못한 아빠의 제주 생활 이야기와 엄마가 면회 왔던 그 설레는 시간들에 대해 물어봐야지.
그때의 모슬봉이, 그 시절의 아빠가 더욱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