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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May 11. 2020

아주 '말똥말똥' 하지 말입니다

올레길 이야기 | #제주올레길걷기 #올레길14-1코스 #말똥트라우마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으니. 오전 안에 빨리 끝낼 수 있는 총 거리 9km의 14-1코스가 적당하겠다 싶었다. 이제까지 걸었던 우리의 평균 속도로 보자면 시간당 약 4km를 걷는 셈이니, 완주 스탬프까지 총 2시간 반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종점은 수려한 녹차밭 풍경을 볼 수 있는 오설록. 경사가 높지 않은 난이도 ‘하’ 코스에 오설록까지 이어지는 길이니, 걷기도 편하고 길도 이쁘겠지? 얼마 전 다녀온 오설록의 푸릇한 풍경이 떠올라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점심때쯤 올레길 걷기를 끝낸 뒤, 오설록을 비롯해 주변 관광지를 다녀올 계획도 세워뒀다. 오늘만큼은 걷기에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데이트하기에 좋은 옷을 꺼내 입어야지. 늘 입던 올레꾼 복장, 바람막이와 레깅스 그리고 줄 모자를 모두 던져버리고.


여느 날처럼 6시 반쯤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언제나처럼 좋은, 아침의 여유를 즐기고 오설록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9시. 직원으로 보이는 분들과 출근길을 함께 걸었다. 일찍 온 덕에 매장이 오픈하기도 전, 사람 없는 틈을 타 잘 가꾸어진 산책길을 여유롭게 걸어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녹차밭에서 우리 둘만의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이번 코스를 역으로 걷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을 우리 집 앞마당처럼 편안하게 즐기다니. 곧 비를 쏟아부을 것 같은 거뭇거뭇한 구름 아래에 있으면서도, 기분만큼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적당히 따뜻한 햇볕이 함께하는 봄날 같았다.



오설록 녹차밭



이젠 관광객에서 올레꾼이 되어야 할 시간. 더 지체했다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걷기용 운동화로 갈아 신고 머리를 질끈 묶고서 오늘의 출발 지점이자 14-1코스의 완주 스탬프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스탬프 간세가 눈에 잘 띄는 도로가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는 길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찾을 수 없었다. 포털사이트 검색을 통해 오설록 녹차밭 뒤편에 위치해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주차장에서 벗어나 큰 도로를 끼고 왼쪽 옆으로 둘러가기를 선택했다.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오설록 도로 옆 입구는 들어가지 말라는 표식과 함께 진입할 수 없도록 막혀 있었고, 다행히 휴대폰 지도 어플을 보며 숲길을 통해 종점까지 가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주차장 안쪽에서 건물 뒤편, 종점 스탬프까지 넘어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나중이 돼서야 알았다) 아직 제대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벌써 걸음 수가 꽤 쌓였다. '오늘 쉽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들어선 숲길은, 정돈이 되어있지 않은 좁고 울퉁불퉁한 돌길이었다. 심지어 넓지 않은 길목에서 말의 것으로 추정되는 어마-무시한 양의 똥을 두어 차례 목격했다. 오설록 녹차밭에서 마냥 좋아 해맑게 웃기만 했던 나의 봄날 같던 기분에도 곧 비가 내릴 것처럼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저지 곶자왈, 차마 ‘그것’을 찍을 수는 없어 근처만 찰칵.
앞장서서 ‘그것’의 위치를 파악해주겠다는 그. ‘그것’의 너무 잦은 출몰로 심각해진 뒷 모습.



어렵사리 찾은 완주 스탬프를 찍고, 비로소 진짜 올레길 걷기를 시작했다. 쉽지 않은 시작에 벌써 조금 지쳐있는데 이어 설상가상으로 일기예보는 오후부터 내린다던 비가 오전 11시부터 시작된다고 바뀌어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둘이 마주 섰다. 돌아갈까?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스탬프 간세를 찾는 험난한 여정의 여파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럼에도 가야 할 이유들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만일에 대비해 가방에 우비도 챙겨 왔는걸? 짧은 코스니까 비오기 전에 끝낼 수 있을지도 몰라. 무엇보다, 완주 스탬프를 찾고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게 너무 아깝지 않아? 짧은 논의 끝에 결국, 못 먹어도 고! 를 외치며 지친 걸음에 다시 한번 힘을 실어보기로 했다. 큰 도로 길을 지나고 숲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아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를 지치게 했던 몇몇의 상황들이 앞으로의 재앙을 암시하는 복선이었음을 알게 되는 일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 눈에 들어온 통신 불량구간이라는 안내판. 여기가 저지곶자왈이구나. 이 안에서는 전화 연결이 잘 되지 않아 길을 잃으면 위험하다는 가이드북 내용을 미리 읽어두었지만 현장에서 두 눈으로 안내판을 읽는 순간, 싸늘함을 느꼈다. 저지곶자왈은 제주올레에서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너비로 덩굴을 잘라내고 만든 길이라고 했다. 예부터 있었던 길이 아니어서 오고 가는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직 많이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가 계속 이어져 짧은 코스임에도 평소보다 걷는 속도가 2배 이상 느려졌고 시간은 자꾸만 지체되어갔다. 좁은 숲길에 자잘한 돌이 많아 걷기 쉽지 않았던 것이나 흐린 날씨가 만들어낸 어둡고 으스스한 분위기. 이런 것쯤은 애교라 할 수 있다. 그보다 우리의 걸음 느리게 만드는 것은 말의 똥(앞으로 많이 나올 것이기에 '그것'이라고 하겠다)이었다.


정확히 새어본 것은 아니지만 체감상으로는 1분에 한 번, 길게는 3분에 한 번 꼴로 어마어마한 양의 그것들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 위, 어떠한 일관성도 없이 마구잡이로 놓여있었다. 이곳 저지곶자왈은 월림-신평 곶자왈 지대 중에서도 가장 식생 상태가 양호한 지역으로 다양한 상록 활엽수들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지만.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며 생명력 넘치는 자연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는 내 것이 아니었다. 목덜미가 뻐근해질 만큼 시선을 바닥에 항상 고정시켜야만 했고 정면을 보고 걷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종점에서부터 2.3km를 걸었다는 표지판이 나올 때까지 줄곧 그랬다. 못해도 200번 이상의 '그것'을 피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꽤나 긍정적이라고 자부하는 우리인데.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말만 계속 나왔다. 하늘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속 코를 찌르는 냄새를 맡으며 '그것'의 형체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2.3km 이후부터는 '그것'이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다. 문도지 오름을 지나 목장에 도착할 때까지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 신발은 '그것'으로 칠갑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만에 보는 하늘인지. 기념해야한다며 찰칵
심지어 이 아이는 사진찍는 도중에 ‘그것’을 배출해냈...... 아이고 머리야. 혹시... 길 위에 것들도 너의 것이니?
아니면... 너희의 것이니?



한시름 놓고 잔뜩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건, 목장을 지나서부터였다. 우리가 상상했던 올레길이 그제야 나타났다. 자잘한 돌도, 말의 '그것'도 없는 한적한 길. 경사가 없이 평평하고 양쪽으로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빼곡히 지키고 서있다. 안심이 되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 '그것'의 냄새를 맡고 형체를 본 탓인지 니글거리는 속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냈더니 짧은 거리의 코스임에도 30km 정도의 거리를 걸은 것 같은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걸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남은 길을 힘겹게 걸었다. 제주올레 패스포트에 마지막 완주 스탬프를 찍자마자, 그대로 방전. 스탬프 간세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올레길 한 코스당 500ml 물 2개, 텀블러 2개를 꽉 채운 얼음물을 가지고 다니며 모두 마시고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우리인데. 이 날은 모든 걷기를 끝내고 차에 돌아갈 때까지 물을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아무것도 입에 넣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냥, 힘이 들었다.


예쁜 옷을 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출발을 외쳤던 아침의 우리는 온데간데없었다. 14-1코스를 완주하고는 계획했던 이후의 모든 일정을 접어둔 채, 서둘러 집으로 가기를 택했다. 몸이 힘들어 쉬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마음이 편안한 장소에서 충분한 정신적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었다.



올레길 걸으면 흔한 이 풍경이, 이렇게 반갑고 소중하다니.



혹시 모른다. 우리가 걸었던 그 날이 유독 흐렸고 그 날에만 유독 말의 '그것'이 많았던 것일지도.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와 같이 난이도 '하'이기 때문에 혹은 오설록이라는 말에 혹하여 가볍게 생각하고 이 코스를 선택하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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