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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May 13. 2020

여행이란 거 뭐 별거 있나

미스 제주댁 이야기 | #제주살이 #동네산책 #혼자여행



오늘 하루는 늘 함께였던 그와 ‘따로 또 같이’ 보내기로 했다. 제주살이를 하는 동안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혼자만의 시간.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생각해봤지만 결국, 별다른 계획 없이 여느 때처럼 이른 아침에 일어나 맛있는 녀석들과 함께 밥을 먹고 운동을 한 뒤, 아로마 오일을 몇 방울 넣은 따뜻한 물에 반신욕을 즐겼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멍 타임이나 해볼까 싶어 창 밖의 풍경과 마주하고 앉으니, 어느새 오후 2시. 육지에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이 날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한 건, 제대로 멍을 잡은 지 몇 분 되지 않은 때였다. 내일 있을 비 소식 때문에 잔뜩 흐리기만 했던 하늘에 갑자기 햇볕이 쨍하니 내리쬐더니, 그 빛에 나무의 푸릇한 잎들마저 반짝이는 게 아닌가. 마치, 집에서 뭐 하고 있냐며 나오라는 손짓처럼 말이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 난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저스트 원 텐미닛. 준비는 10분이면 충분했다. 선크림 하나 얼굴에 툭툭 바르고 손에 집히는 아무 맨투맨에 헐렁한 멜빵바지를 딱딱 챙겨 입은 뒤, 슬리퍼를 착착 신은 채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제주도민 인척 무심해 보이게.





오랜만에 혼자 걷는 길. 목적지는 한담 해안산책로 애월 카페거리로 정했다. 집에서 도보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으니, 동네 구경을 하며 걷기에 적당한 듯했다. 언제 와도, 언제 봐도 늘 푸른 나무와 밭을 둘러싸고 있는 밭담, 집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울담 등의 다양한 제주 돌담들. 느린 걸음으로 동네 이곳저곳을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남기다 문득, 깨달았다. 섬에 내려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만을 다니기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제주의 모습들을 더 많이 보고 싶어 올레길을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우리의 보금자리가 있는 이 동네를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음을.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말을 그리도 많이 쓰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내가 지내는 이 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특별한 지 모르고 있었다니. 눈 뜬 장님이 따로 없었다.


내가 줄곧 머물고 있던 이 동네야 말로 '찐'제주였다. 제주 지역의 특색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으면서도 평소 듣지 못하는 각종 새들의 울음소리, 동네 주민들의 제주 방언까지도 오고 가며 들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여행지였는데. 쉴 때는 집에서 보이는 창문 밖 동네 풍경이면 충분하다 여겼고, 외출할 때는 아침 일찍 나가서 온통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해진 다음에야 집에 들어왔으니. 소담하고 한적한 동네의 이모저모를 찬찬히 둘러볼 새가 없었다.


휴대폰을 들어 '여행'을 검색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여행을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님'이라 정의했다. 무릎을 탁 쳤다. 맞아! 여행이란 거 뭐 별거 있나. 본래 살고 있는 집을 나서서 그곳이 어디든 돌아다니는 모든 행위가 여행인 것을. 제주에 와 있으면서도 특별한 어딘가를 가야만,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의 나를 나무라듯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어느새 한담 해변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오랜만에 혼자 하는 여행. 찐 제주의 풍경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깨달음을 얻기도 하며 눈 앞에 펼쳐진 모습들에 감탄하다 보니 한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났다. 하루 한 번 이상 보면서도 볼 때마다 큰 감탄을 자아내는 제주의 바다. 뭉근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바다 위에 부서지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비늘을 만들어냈다. 그 위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시원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까지. 섬에서 지내며 꽤나 자주 보았던 익숙하고 친숙한 풍경들에 여행이라는 단어를 하나 얹었을 뿐인데. 괜스레 새롭고, 왜인지 마음이 자꾸만 콩닥 였다.


그를 만나 함께하는 여행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언제부터인가 혼자 여행을 하는 것과는 조금씩 멀어져, 이제는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아득해진 요즘이었는데. 오랜만에 혼자 걸어 본 짧은 산책길의 끝자락에서 이 달의 제주살이가 끝나고 푸릇한 제주가 가장 빛나는 가을에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네를 자박자박 걸으며 오늘처럼 콩닥거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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