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의 종언, 호랑이는 독수리의 날개 아래 올라탈 때

'영면'에 들어간 WTO

by 피에트로

WTO의 종언, 트럼프 라운드의 시작

미국이 마침내 WTO 체제를 내려놓았다. 이제 시장 접근권은 가차 없이 무기화되고 있다.

‘턴베리 선언’이라는 상징적 이름과 함께, 관세와 투자 약속을 무기로 새로운 무역 질서를 구축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와 우루과이 라운드로 대표되던 규칙 기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 힘과 거래가 지배하는 ‘트럼프 라운드’로의 전환이 시작됐다. 이는 단순한 정책 변화가 아니라 국제 경제 판도를 통째로 바꾸는 사건이다.

1995년 WTO 출범 이후 세계 무역은 ‘다자 협상과 규범 준수’라는 공통 언어를 사용해왔다.

분쟁이 생기면 기구를 통한 중재와 판정이 있었고, 합의 내용은 예측 가능성을 담보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그 언어를 단호히 버렸다. ‘시장 접근’이라는 절대 권한을 협상 카드로 휘두르며, 자국 이해에 맞지 않는 약속이나 규칙은 지킬 의사조차 없음을 드러냈다.

이는 WTO 체제가 사실상 ‘영면’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새 질서의 원리, 시장 접근을 무기화하다

1943년 발행된 DC코믹스의 슈퍼맨 #24

트럼프 라운드의 핵심은 명확하다.

“미국 시장에 들어오고 싶으면 대가를 치러라. 약속을 어기면 곧바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과거 WTO 시대에는 관세율 인하와 비차별 원칙이 기본이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미국은 필요하면 언제든 관세를 올리고, 그 부담을 협상 도구로

활용한다.

심지어 ‘최종 합의’도 과거처럼 종착점이 아니다.

합의 후에도 미국이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조건을 바꿀 수 있고, 상대국은 이를 막을 제도적 수단이 없다.

이 질서는 ‘시장 접근’을 절대적 유인책으로 삼는다. 미국은 세계 최대 소비시장과 기술·금융 중심지다. 여기에 접근할 권리를 얻는 것은 분명 큰 유익이다. 하지만 그 권리가 언제든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시장은 매력적이지만, 입장료는 비싸고,

계약은 일방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국가 경제는 순식간에 종속 상태로 빠져든다.



세계는 지금 숨 고르기와 불신

유럽연합은 고율 관세를 피하기 위해 턴베리 합의에 서명했지만, 내부에선 회의론이 팽배하다. 일부 유럽 언론은 “이번 합의는 법적 구속력도, 지속 가능성도 불확실하다”고 비판한다. 회원국 사이에서도 미국에 ‘전략적 굴복’이 아니냐는 불편한 시선이 존재한다.

아시아 각국은 더욱 복잡하다. 중국은 자국 제조업과 수출의 전략적 재편을 서두르고, 일본·대만 등은 미국과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도 대체 시장을 모색하는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크다. 지금 전 세계는 ‘미국의 새 질서’가 단발성 이벤트인지, 장기 체제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새로운 규칙이 다자회의에서 합의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상대국이 적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한국, 안보 동맹이 경제 안전망은 아니다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이유로 경제 관계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변화는 그 기대가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은 안보 파트너이지만, 경제에서는 철저히 이익 계산을 하는 거래자일 뿐이다.

이미 한국 주력 산업인 자동차, 반도체, 조선이 타깃이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과 협상에서 제시된 15% 관세 프레임과 수백억 달러대 투자 약속은 언뜻 ‘성과’로 보이지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거나 미국이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관세 인상과 추가 요구가 쏟아질 수 있다.

더욱이 미국 관세 정책은 표적 조정이 가능하다. 특정 품목, 특정 기업, 특정 지역을 정밀 타격하는 방식이다. 이는 산업 생태계 전체에 충격을 주며, 특히 중소·중견 기업이 먼저 무너질 위험이 크다. 동맹이라는 말 한마디로 이런 위협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외교 현실을 모르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반미정서의 유혹과 함정

경제 충격은 단순 무역수지 악화나 성장률 둔화에 그치지 않는다. 대량 실업과 산업 붕괴는 곧 정치적 불만과 분노로 이어진다.

그동안 ‘반미정서’와 ‘반미 선동’이 만연했던 국내 정치·언론 환경에서 이 분노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 ‘반미정서’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표출될 위험이 크다.

문제는 이 감정이 국가 전략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 정치 세력은 이를

친중·친러 성향 강화, 반동맹 노선 확산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다. 이는 곧 한국 외교·안보 기반을 약화시키고, 경제적 고립을 심화시킨다.

한국 경제는 미국의 정밀 타격형 통상 정책 앞에서 비대칭 의존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감정적 대응은 냉혹한 국제 무역 현실 속에서 자멸로 이어질 뿐이다. 백척간두에 선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과 전략이다.



굴복도, 무모한 대결도 아닌 실력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명확하다.

첫째, 실무 외교의 정밀화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모든 조건을 법적·제도적으로 명확히 하고, 모호한 합의나

구두 약속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둘째, 산업 현장의 안정과 혁신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노란봉투법’ 등 산업안전법을 둘러싼 노동계와

경영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법 제정 취지는 산업재해 예방과 노동자 안전 확보지만, 현실에선 일부

노동계의 과도한 요구와 무리한 쟁의 행위가 산업 현장에 혼란을 초래한다.

이는 산업 경쟁력심각하게 훼손하고, 투자 위축과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한국 산업은 미국 중심 통상 압박과 무역 분쟁이라는 다중 위기 속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노동시장 불안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정부와 사회는 노동계와 경영계 간 불필요한 충돌을 최소화하고, 합리적 대화와 신뢰 회복에 주력해야 한다.

아울러 미래 산업 육성, 디지털 전환, 친환경 투자 등 혁신 전략과 병행해 산업 현장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제도 보완도 시급하다. ‘산업 안정과 혁신’ 두 축을 견고히 할 때만 한국 경제는 내외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셋째, 내부 결속과 사회 안전망 강화다. 산업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피해 산업·지역 지원책을 조기에

시행하고, 노동 전환과 재교육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양쪽에 잘 보이기’ 식 애매한 외교를 버려야 한다. 국익을 지킬 힘은 상대가 우리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실력에서 나온다. 미국이 우리를 진정한 경제 파트너로 존중하게 만들려면, 협상력과 대체 옵션을

동시에 키워 상실한 줏대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호랑이는 독수리 앞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나

트럼프 라운드가 일시적 바람인지, 장기 체제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준비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WTO 시대의 예측 가능성은 이미 끝났다. 이제는 힘과 실력, 냉철한 국익 계산이 생존의 조건이다.

미국을 무작정 따라가서도, 무작정 거슬러서도 안 된다. WTO 시대의 규범이 무너진 지금, 한국 경제는 풍전등화와 같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작은 흔들림에도 꺼질 수 있는 촛불과 같지만,

꺼지지 않으려면 단단한 뿌리가 필요하다.
국익 우선의 실리 외교와 탄탄한 산업·사회 인프라 구축만이 이 거센 파도 속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다.
WTO 시대가 저물고, 호랑이는 이제 독수리의 날개 아래 올라타
후대에 번영과 위상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두 손을 내밀어 국제 원조를 구하던 토끼가 될 것인지, 갈림길에 선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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