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서 기인한 합병증
세상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절망의 순간은 이 인생의 진리 앞에 억지로 무릎을 꿇릴 때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 무슨 공부냐는 패기나 여유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시기. 그러나 그것은 표면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1학년 때부터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자의 인생만큼 여러 이유로 높은 성적을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나의 경우는 기숙사였다.
학교 기숙사는 전체 학생의 8%밖에 수용하지 못했다. 자연히 경쟁은 치열했다. 그러다 보니 기숙사 정책이 자비를 베푸사 9점 만점의 보너스 점수 같은 것이 내려졌는데 등본상 거주지와 학교 간의 거리에 따라 차등적이었다. 학창 시절 도시로 이사하는 친구들이 부러워 괜히 원망했던 읍내의 우리 집은 팔자에도 없는 만점을 받아 나의 성적 스트레스와 수고로움을 덜어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숙사생 선발 방식이 바뀌었다. 1학기까지만 해도 나는 내 단과대학 학생들 하고만 경쟁을 하면 됐었는데 그다음에는 교내 모든 학생들과 침대 한 자리 한 자리를 놓고 다투어야 했다. 거리점수를 생각해 여유롭게 공부하던 나는 뒤통수를 세게 갈겨맞은 느낌이었다. 과 동기에게서 이런 소식을 듣고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불합격이라는 통보와 함께 현실이 되었고 나는 당장에 다음 학기를 보내기 위한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다.
학교는 경제 자유구역 내 기업들을 위한 부지 가운데 소재했다. 그래서 서울의 흔한 대학가는 꿈 꿀 수 없었다. 상가는 물론 원룸이 들어설 자리도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계획된 곳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버스로 40분 떨어진 동네에서 방을 구해야 했다. 부동산 어플을 여러 개 설치했다.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찾아가 발품을 팔았다. 그 많은 매물 가운데 내가 갈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어플에는 허위매물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중개인은 대학생 한 명을 상대로는 친절치 않았다. 30만 원 대 월세방은 쾌적하지 못했고, 40만 원대로 가자니 월세를 감당할 대책이 안 섰다. 결국 큰 결심을 하고 8평짜리 월 40의 방으로 보금자리를 정했다. 집을 구할 때 가장 신경 썼던 것은 소음이었다. 그때 나는 혹여 내가 발생시킬지도 모르는 층간소음만 신경을 썼다. 입주할 때까지만 해도 4층이 꼭대기 층인 줄 알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위층에 사람이 들어왔다. 위층에서 내 방으로 소음이 전해졌다. 빗자루로 천장을 툭툭 쳐보니 가벼운 울림소리가 났다.
기숙사를 떨어졌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미안한 마음도 컸다. 바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그렇게 해서 학원 두 곳, 공방 한 곳에서 일했다. 일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너무 바쁠 뿐이었다. 체력을 깎는 만큼 금전적인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그 지점부터는 정신을 갈아 넣어 체력을 위조했다. 일상의 여기저기가 삐걱거렸다. 가장 큰 문제는 잠을 못 제대로 잔다는 것이었다. 밤 9시가 되면 몇 있지도 않은 상가들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가로등도 시원치 않아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너무 조용해 수상한 소리가 들리기 쉬웠다. 그래서 불을 끌 수 없었다. 텔레비전 소리는 아무리 작게 해도 너무 잘 들렸다. 새벽인데 마치 저녁인 것처럼 불을 켜고, 텔레비전 소리를 벗 삼아 뜬잠을 잤다. 지나치게 밝은 햇살에 감았던 눈이 시려서 일어나면 이미 아침 수업은 절반이 지나갔을 시간이었다. 이런 일은 이따금씩 일어났다.
일주일 중에 화요일 하루만 빼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점은 19학점을 신청했다. 전공필수과목은 3과목이었고 그중 한 교수에게 찍혔다. 교수님 각자가 적게 냈다고 생각하는 과제는 전부 모아보니 태산이었다. 마감일은 언제나 시험기간에 임박해 과제와 시험을 동시에 준비해야 했다. 일은 계속 나갔다. 내가 시험기간인 것처럼 학생들도 시험기간이어서 학원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보충수업을 해주고 돈이나 벌어가라는 원장의 주둥이에 시험 예상문제지를 구겨 넣고 싶었다.
자취를 한 지 한 학기가 다 되었을 때 성적표를 확인했다. 포탈에 로그인하는 손가락에는 자신이 없었고 확인한 후에는 욕을 했다. 나를 찍은 교수가 선사한 성적은 C+이었고 이 말인즉슨 한 학기를 더 자취방에서 지박 하라는 것이었다. 그때쯤에는 이미 체력을 위조할 정신마저도 바닥나가고 있었다.
유난히 힘든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괜히 핸드폰의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지금의 내 사정을 말하면, 괜찮냐는 심심한 안부라도 물어줄 사람을 구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당장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두 번째는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 세 번째는 빈말을 못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하는 어떠한 위로라도 내가 납득할 수 있으려면 진심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연락처 목록을 아무리 뒤지고 찾아봐도 이 조건들을 만족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가족에게 기대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심적인 고난 앞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게 되는 것인지, 결국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조각칼을 한 번이라도 써본 사람은 그것이 지나간 자리가 어떤 자국으로 남는지 알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채기 난 마음은 조각칼이 지나간 고무판처럼 깊게 파였다. 나는 힘들다고 말했다. 가족 안에는 너보다 힘든 사람이 많으니 힘들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힘든 것이니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사람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잡은 지푸라기가 뿌리째 뽑혀 함께 떠내려갔다.
자취방에 옵션으로 있던 침대는 한 사람이 쓰기에는 큰 편이었다. 나 만한 사이즈의 인간을 두 명은 더 욱여넣을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원룸에 꽤 상당한 자리를 차지한 모양새가 주제넘기 그지없었다. 그 침대에 모로 누웠다. 누인 몸 옆으로 바람만 지나쳤다. 아침 댓바람부터 대청소를 한 탓에 집은 깨끗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마음은 어질러질 대로 어질러져서 발끝으로도 설 수 없었다.
꼭 그 외상과 내심의 차이만큼 외로웠다.
그 전화 뒤로 밤이 되면 누군가로부터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연락 대신 외로움이 들이닥쳤다. 그 시간은 누군가에겐 꿈이고 누군가에겐 저물어 가며, 누군가에게는 아직 낮이었겠지만 어느 누가 나와 진정한 동 시간을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다 한들 혹시 자고 있느냐고 물어볼 용기 같은 것도 없었다.
외로움은 겨울 기온 속에서 액화하여 얄팍한 매트리스 위로 차올랐다. 너울졌다. 내 존재는 모래 위에 쓴 이름처럼 파도에 닿아 자꾸 지워지려 했다. 부질없도록 침식했다. 그렇게 밤이 지났다. 새벽이 울먹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쯤 윗집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아래에서 위로 퍼졌다. 가까워졌다. 여자의 목소리와 그 옆 남자의 목소리가 각자의 음역대에서 건물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문이 열리고. 문이 닫혔다.
그 날의 수상한 소리는 그 방에서 들려왔다. 천장을 타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 웃음기 머금은 소리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8할쯤 더운 숨으로 바뀌었다. 여자는 많은 단어들을 상실하고 모음 하나밖에 몰랐다. 남자도 한 음절로 일관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지만 공기가 소리의 절반을 차지했다.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를 채웠다. 둘은 하나가 되었다.
디지털시계 가운데 초점 깜빡임에 맞추어 여자는 희열 했다. 그리고 천천히 가장 높은 언덕을 올라갔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벽을 타고, 창문을 넘어왔다. 천장을 사이에 두고 윗집은 열기 띈 낙원, 내 방은 칠흑 같은 심해였다.
밤새 저체온증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