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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치욕

by 김라강


내 또래 친구들의 형제 관계는 대부분 두 살에서 세 살 차이였다. 아마 아주 보통의 나이 차이가 그럴 것이다. 나는 그 대개의 경우들과는 달라서 내가 태어나고 열 번째 맞는 춘삼월에 동생을 만났다. 첫 만남에는 사람인지 아니면 조금 큰 애벌레인지 구분이 안 갔다. 이제 막 하얗게 빨아 말린 넓고 긴 포대기에 싸여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민들레 홀씨같은 머리카락과 속눈썹은 색이 여물지 않아 옅었다. 숨소리는 어찌나 작은지 차라리 풀벌레 소리가 더 컸다. 혹여나 내 인기척으로 깰까싶어 숨을 꾹 참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애기야, 애기야' 얼마나 불렀는지.


그 다음 해 여름, 우리 가족은 열대야에 못 이겨 바다수영을 갔다. 시골의 어두운 밤은 온통 까만 도화지 같아서 어디까지가 땅이고 바다의 시작인지, 어느 높이까지가 산이고 하늘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 날은 달이 동그랗고 하얗게 휘영청 밝았고 달빛을 받아 물결은 반짝이며 일렁였다. 내 옆에는 식구들의 옷가지만 남았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아기를 품에 안고 물이 닿지 않는 둑에 걸터 앉았다.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이면서 보둥보둥 재웠다. 아기의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면 손으로 목과 머리를 받쳤다. 나는 강아지풀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볐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동생에게서는 정말 '아기 냄새'가 났다. 끓는 물에 비누를 넣고 폭폭 삶은 옷에서는 햇살의 냄새가 났다. 그때의 나도 겨우 초등학생이었지만 '넌 언제 클래, 애기야'라고 웅얼거렸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 듯, 동생은 언제 아기였는지도 모르게 커버렸다. 벌써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다. 내 성장판이 눈치없이 일찍 닫힌 탓에 동생과 키가 엇비슷하게 되어갔다. 사실 키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3년 내내 집에 와 머무른 것은 다 합치면 세 달 쯤 되려나. 동생이 나를 보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집에 있는 모습이 익숙해질만 하면 다시 기숙사로 가야했다. 그러다가 대학을 현역으로 들어가지 못해 집에서 독학재수를 했던 때가 그나마 동생이 또렷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때 동생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다.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맨날 방에 틀어박혀있거나 아버지와 싸우고 우는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으니까. 그 때의 나를 동생이 어떻게 기억하든지 나는 지금 그때와 크게 다를바가 없다. 다른 점이라고는 대학 마지막 학년이라는 것 뿐이다. 키가 자라지 않는 것보다는 나의 사회적 모습이 여기서 더 변화하지 않을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나이차이가 열 살이나 나면 어른으로 보일만도 한데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으니까. 동생은 그런데도 가끔 나에게 어려운 질문을 물어왔다. 부모님에게 물어보기는 했는지 모르겠으나 큰언니도 제치고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안도했다. 아직은 언니 취급해주는구나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온 문자의 내용은 '나를 사랑하는 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태연하게 물어오는 그 순수한 태도는 나를 그 질문의 아득한 깊이로 떨어뜨렸다.


'사람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공통되는 방법 같은거 말이야.'


공통되는 방법... 아마 그런 통용법이 있다면 그것은 유사 진통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병원 인근의 한 블럭 안에 많으면 3개까지도 있는 편의점과 그 안에 쌓여있는 타이레놀 같이, 환자 맞춤으로 내려지는 처방전과 달리 한 알 삼키면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그런 것.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의 인생도 조금은 덜 아프고, 덜 힘들고, 좀 더 버티자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있을 텐데.

나는 그 방법을 몰라서, 그 진통제가 없어서 비난의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고등학생 때는 부모님의 자랑이었다가 수능 이후에는 친척들과 지인 앞에서 애써 변명이 필요한 부끄러움으로 바뀐 것도, 교재며 인터넷 강의며 독서실 비용을 어머니의 한숨과 받아낼 때도, 졸업 후에는 어떻게 할거냐는 물음에 그저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상황도, 큰언니의 집에 얹혀 살면서 월세에 한 푼 보태주지 못하는 것도, 남동생이 월급에서 떼어 부모님께 보내는 100만원에 속이 쓰라린 것도, 전부 나의 탓으로 돌렸다.


동생에게 이런 저런 대답을 하려다 막혔다. 문자는 쓰다 지워서 결국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고 또 돌아왔다. 애꿎은 커서만 제자리뛰기를 했다.

고심 끝에 겨우 한 말이 건강을 잘 챙기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겠냐였다. 질문의 크기에 비해 답변이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도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시간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또 열심히 산다고 해서 자연히 얻게되는 깨달음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동생은 답변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가 미안했다. 아직 덜 자란 언니라서. 네가 기대하는 것 만큼 어른스럽지 못해서.

세상이 점점 어려워진대. 사람도 무섭고 돈은 그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라는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덜컥 겁이 나.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어. 그치만 시스템 바깥으로 걸어나가 세상 사람들 사는 것과 반대로 살아갈 용감함도 없고, 그렇다고 이 땅에서 잘 살아나갈 전투적인 마음도 없는 것 같아. 나는 언제나 비겁함과 용기의 경계에서 한 뼘 만큼 떨어져 용기의 바깥에 있고, 이기심과 이타심을 견주다가 이기심의 손을 들 때가 많아. 수 많은 가치의 경계에서 치우쳐진 줄다리기를 하고 그 애매함에 치가 떨린다.


그런 내가 나는 너무 부끄럽다. 자라나는 네 앞에서 치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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