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은 이제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15번있는 연차를 반도 다 못썼다. 늘 그리해온 일이지만 어째 요즘은 그리 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일 년 365일 중 15번을 더 쉰다고 무슨 큰일이 날까 생각해보면 멋쩍어진다. 미련을 떠느라 보이지 않는 줄로 스스로를 묶어둔 셈이다. 하여 추가 원고도 마무리할 겸, 쉴 겸하여 네 번째 연차를 썼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 늦잠을 자고 10시쯤 일어나 밥을 지었다. 얼마 만에 짓는 밥인지 하고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불릴 새도 없이 바로 고압 취사 버튼을 누르고 어제 퇴근길에 산 고구마 줄거리, 취나물을 덜어 두었다. 언제 사두었는지 알 수 없는 레토르트 미역국을 꺼내 유통기한을 확인하니 아직 한참이 남았다. 레토르트나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확인할 때마다 과거에서 온 무엇가를 꺼내 먹는 듯하여 기분이 오묘해진다. 지난 제조 날짜와 한참 남은 유통기한 이 와중에 신선한 상태가 하나로 맞물리지 못한 채 오묘한 기운을 남긴다.
다된 밥 옮겨 담아 좋아하는 프로그램 보며 먹는 집밥이 오늘따라 울컥하게 맛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다운 이 작은 공간에서 온전히 나를 위한 이 한 끼가 너무 아늑해서 마음이 몽글해졌다. 앉은자리에서 다 먹은 밥그릇만 싱 그대에 넣어두고 보던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식곤증이 밀려오니 침대 위 이불을 파고들고 싶다. 노곤해진다. 먹자마자 눕는 게 영 석연찮지만 오늘은 휴가니까 하고 작은 일탈을 감행하기로 한다. "아- 이곳이 천국이구나" 잠이 스르르 온다.
이런 게 집밥의 위로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사소한 위로 아닌가.
글과 사진 ㅣ 글리 @heyg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