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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Sep 08. 2019

코코아 냄새가 피어오르면


코코아 냄새가 피어오르면

그날이 떠올라


비가 우두두 억수로 쏟아지는 날엔 습하고 눅눅한 물 입자 사이로 뜨끈한 코코아 냄새가 피어오른다.


초등학생 때 일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3학년 때 일이다. 마을이 워낙 시골이라 버스는 두 대 뿐이었고, 그마저도 학교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작은 걸음을 재촉해 20분을 걸어야 했다. 등하굣길이 만만찮으니 엄마는 입학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도 입학과 동시에 다니기 시작한 피아노 학원에서 학원차를 운행을 해주기로 했다. 덕분에 엄마의 고민은 일단락됐고, '등하굣길 학원차 운행 서비스'를 시작한 피아노 학원은 대박이 났다. 온 동네 또래 친구들이 등하교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처음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게 된 이유는 못생긴 손가락이 조금 더 길쭉길쭉, 곧고 곱게 다듬어지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에서였다. 이 글을 쓰며 눈에 들어온 손을 보고 있자니 6년을 다녀 이만해진 건지, 무용한 일이 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 번은 복도에 앉아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다가 학원차를 놓친 적이 있다. 정신을 차리고 친구들과 부랴부랴 뛰어 나갔지만 늦었다. 엄마한테 혼날 걸 생각하니 한숨만 푹 나왔다. 마침 비가 두둑두둑 떨어지기 시작해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공중전화로 걸어갔다. 집으로 전화를 걸까 하다가 곧장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까지 걸어가려면 논을 가로질러 30분은 족히 걸어야 했지만 동네 친구가 함께 있어 오히려 재밌었다.


"비 맞고 걸어가면 엄마가 학원 안 간 거 가지고는 안 혼내시겠지?"

"더 혼내실 거 같은데?"

"비 맞고 가면 불쌍하잖아. 불쌍한데 혼내실까?"


결국 비를 쫄딱 맞고 집에 들어갔다. 엄마는 비 맞은 나를 보고 놀라셨고, 이 비를 맞고 걸어온 사실을 알고는 더 놀라셨다. 현관에서 젖은 옷을 다 벗기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라 하셨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니 고실고실 개운했다. 엄마는 뜨거운 물에 코코아 가루를 타 주셨다. 둥글 납작한 지관통에 녹색 뚜껑, 마일로 코코아 가루. 어딘가 심심하지만 달짝지근 한 물에 탄 코코아. 홀짝홀짝 마시며 엄마 눈치를 봤다. 그사이 책가방이 발랑 뒤집힌 채 건조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엄마가 물었다.


"학원차는 왜 놓쳤어?"

"공기놀이하느라"

"전화는 왜 안 했어?"

"..."


엄마는 앞으로 걸어오게 되더라도 먼저 집으로 전화해 행선지를 얘기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 뒤로 한참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내심 크게 혼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시름 마음을 놓고 나니 뒤따라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따라붙었다. 조용히 아무 말도 못 하고 뜨거운 코코아만 후후 불어댔다. 코코아 표면이 일렁였고 파동이 사라질 때쯤 다시 바람을 불었다. 뜨거운 단내가 뿌옇게 피어 올라 코 끝에 방울방울 맺혔다. "엄마,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뚝뚝 떨궜다.


2주째 주말 없이 하루 열두어 시간을 제조와 배송에 힘쓰고 있다. 다리가 퉁퉁 붓고 어깨가 쿡쿡 쑤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그래도 힘들지는 않다. 몸이 조금 고될 뿐. 그저께부터 태풍 링링 영향권에 접어들면서 적잖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둑두둑 빗 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굵고 세차다. 허리를 피려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눅눅한 물 입자 사이로 뜨끈한 코코아 냄새가 피어오른다. 그날의 엄마가 불쑥 떠오른다.


손가락에 욱신거려 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쫙 펴 보았다. 길쭉길쭉 곧고 고운 예쁜 손은 아니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손이 숨어 있다. 15kg 설탕 포대, 20kg 과일 박스는 거뜬히 드는 손, 수만 개의 박스를 빠르고 정확하게 접어 온 손, 디자인도 하고 글도 쓰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잡는 손, 귀여운 강아지 쓰다듬어 주는 손...


엄마 손은 왜 이리 두껍냐고 만지작 거리며 물은 적이 있다. 너는 고생 말고 곱고 예쁜 손을 갖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대답했다. 그런 날이 있었다. 


글과 사진ㅣ 정보화 @heyg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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