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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Jun 13. 2016

어쩌다 보니 그라탱

'치열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세워 빽빽하게 시간을 채우며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 직업으로 삼는 것만으로도 럭키한 일이니, 이상의 핑계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노력이 나를 배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세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퇴근하자!"




매일 야근을 하다 보니 대부분 회사에서 저녁을 해결하곤 한다. 그래서 일찍 집에 들어온 날이면 "저녁은 뭘 해 먹지?"가 늘 핫이슈다.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어본다. 다행히 동생이 도시락을 싸 다니는 덕분에 이런저런 채소들이 좀 있었다. 그런데 딱 그것 뿐이었다.


"얘는 뭘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거야"


빈 냉장고가 짜증스러우면서도 괜히 동생이 짠했다. 그리고 언니로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봐도 먹을 게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식탁 위, 한 조각 남은 식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바로 "그라탱"이 떠올랐다. 냉장고에는 꼴랑 자투리 채소들 뿐이었지만 한 달 전쯤, 토마토 파스타를 해 먹겠다 샀던 레토르트 토마토소스 한팩과 치즈 한 덩이, 어쩌다 키우게 된 바질까지. 나름 구색은 갖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빵은 속을 파내고,

버섯, 양파, 마늘은 기름에 볶았다.

레토르트 토마토소스를 넣고 졸인 후 속을 파낸 빵에 부었다.

위에 치즈를 날창 날창 얇게 썰어 올리고는 오븐에 10분 정도 구웠다.

책상 위 바질을 뜯어 얹었다.


어쩌다 보니 있는 것으로 닥치는 대로 만들었음에도 생각보다 비주얼이 괜찮았다. 사실, 그 모양새가 우습기도 했다. 대충 저녁을 때우려 만들었다고 하기엔 한껏 꾸민 느낌이 드니까. 그리고 괜히 당기는 와인 한잔을 더해 자리에 앉았다. 지난주 때를 놓쳐 보지 못한 드라마도 켰다. 대단할 것 없었지만 최고로 편안하고 아늑한 저녁 식사였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어영부영 만들어진 그라탱 한 그릇처럼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살다 보면 뭐라도 만들어지겠지,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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