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Dec 05. 2017

백수의 왕

내 꿈은 소박하다. 한 100억쯤 통장에 넣어놓고 이자나 받으면서 평생 빈둥대는 것. 딱히 번역 일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일’ 자체가 싫다. 그냥 평생 놀고먹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은 이렇다.


1. 소설을 쓴다.

2. 소설이 드라마화된다.

3. 소설이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된다.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한 게 무조건 쉬운 건 아니어서 1년 전에 세운 이 계획의 진척도는 현재 50퍼센트 정도. 그나마도 어디까지나 ‘시작이 반이다’라는 법칙을 적용했을 때의 얘기고 그걸 빼면 1퍼센트나 되려나. 멀리 10년을 보고 세운 계획이니까 아직 9년이나 남았다고는 하지만 진행이 영 더디긴 하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냥 내가 타고난 귀차니스트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열심히 적당히 연극 동호회 활동을 할 때 그곳 대표이자 연출가인 선생님이 나를 보고 “OO씨는 참 귀찮은 게 많은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를 돌아보니 가히 진리의 말씀이었다. 하긴, 사주를 봐도 한량 팔자라고 나오니 말 다했지.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정말 피치 못할 게 아니면 뭐든 되도록 안 하려고 하는 주의다. 주말이고 평일이고 그냥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는 게 최고다.


생산적인 사람이라면 ‘노니 뭐 하나, 글이라도 써야지’라며 책상 앞에 앉을 테지만 나는 ‘아, 글 쓰기고 나발이고 다 귀찮아, 일단 좀 누워 있을래’ 유형이다. 아니, 번역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글 쓰는 게 귀찮으면 어떡해요, 라고 물으신다면 그게 번역형 글쓰기와 창작형 글쓰기는 또 달라서요.


비유컨대 번역은 마트에서 파는 동태찌개팩을 사 와서 그냥 냄비에 붓고 끓여 먹는 것이라면 창작은 바다에서 직접 명태를 잡아 동태를 만들고 갖가지 재료를 구해다 손질해서 양념도 하고 간도 맞춰서 찌개를 끓여 먹는 것이다. 물론 번역이라고 날로 먹는 건 아니지만 그 수고로움의 정도가 천지차이다.


내 정수리에는 혹이 하나 있다. 태어날 때 엄마 뱃속에서 하도 안 나오니까 기계로 끄집어내다가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것조차도 귀찮아했다는 말씀. 그런 위인이 어디 창작의 수고를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떻게든 글을 안 쓰고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거의 천재적이다. “오늘 나는 글을 쓰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보다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한다. “지금 목록을 작성하지 않으면 마트에 가서 헤매거나 잊어버리니까 지금 꼭 써둬야만 해.” 혹은 “일단 낮잠을 자야겠어. 남은 하루를 잘 보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에릭 메이젠, ⟪작가의 공간⟫(심플라이프, 2014)


내 얘기다.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며 글 쓰기를 미룬다. 그래서 소설을 쓰겠다고 책상 앞에 앉기가 영 어렵다. 어쩌다 간신히 앉혀 놔도 인터넷 서핑 할 때는 멀쩡하던 이 놈의 몸뚱이가 글만 쓰려고 하면 갑자기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결리면서 시위를 해 대는 통에 장시간 버티질 못한다.


어떻게 보면 글러먹은 것 같다. 이래서 뭐가 될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김중혁 작가의 명언. ⟪뭐라도 되겠지⟫(마음산책, 2011).


그래, 내가 마냥 노는 것도 아니고 비록 창작은 아닐지언정 근 10년째 글짓으로 먹고살고 있으니 앞으로도 백수만 안 되면 뭐라도 되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돈 많은 백수가 될 날이 오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