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에어컨을 켜고 잠들었던 방을 나서니 여름의 열기가 후끈 몸속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아기 물건들이 데워진 공기에 엉겨 붙어 호흡까지 더디게 할 정도였다.
주변의 공기가 1도 오를 때마다 육아에 지친 심신은 두 배로 무너져 내린다. 무너진 마음은 때론 남편에게, 때론 큰 아이에게, 그들마저 없을 땐 말 한마디 못하는 갓난아기에게 옮겨 붙기 쉽다. 그래서 여름날의 주말 아침, 나는 가족들과 함께 집 앞 커피숍에 가기로 했다.
아기를 낳고 처음 찾는 카페. 카페란 길을 걷다 무심코 들어가도 좋을 곳이지만, 8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가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곳이다. 아기는 말을 할 수 없고, 의사표현이라고는 웃거나 우는 것뿐이니까. 부디 이 날 만큼은 웃는 날이길 바라며 우리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몇몇 사람들이 드문 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모차를 놓아도 될 만큼 널찍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여름에 어울리는 빙수를 주문했다. 더위에 불거진 몸과 마음을 달래는 데는 차가운 빙수 한 그릇이면 충분했다.
딸은 오랜만의 외출에 한껏 들떠 그간 숨겨둔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이와 이렇게 대화를 나눈 지가 얼마 만인지. 집에 있을 땐 이렇게 오랫동안 딸과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다. 청소며, 요리며, 어린 아기까지 나의 시선을 뺏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어쩌면 딸이 새로 태어난 동생보다 달라진 엄마 때문에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를 돌보기 위해 첫째와 보내던 시간을 빼앗아와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딸은 1년 전 모습 그대로 웃으며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엄마는 그래도 괜찮다는 듯, 다 이해한다는 듯 이야기를 건네주고 있었다.
그 사이 치발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둘째가 슬슬 보채기 시작했다. 남편은 서둘러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이 때다 싶어 펜과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단 둘이 카페에 오면 빼놓지 않는 둘만의 놀이였다. 그런데 딸이 갑자기 엽서를 쑥 내밀었다. 흰 종이 위에 빽빽하게 그려 넣은 글씨와 그림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오늘 못 이룬 꿈을 가지고 한탄하지 마라.
내일 이루면 되니.
딸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시를 좋아하고, 작가를 꿈꾸고, 글씨 쓰는 일을 하며 강의를 나가는 선생님이라고. 그리고 엄마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이것들에서 많이 멀어져 있다는 것을.
많은 여자들이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서 일을 그만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은 마음과 믿고 맡길 만한 보육시설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이유로 많은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아이가 크면 다시 내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불안은 불쑥불쑥 찾아왔다. 육아에 집중할수록 꿈은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가슴에 대고 딸은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한다. 내일 이룰 텐데 무슨 걱정이냐고 이야기한다. 무르기 무른 순두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의 신념을, 딸은 결코 의심치 않았다.
나는 불안해했지만, 딸은 믿고 있었다.
엄마가 내일, 그 꿈을 이룰 거란 걸.
그 믿음을 책갈피에 꾹꾹 눌러 적어 딸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림을 그리던 딸이 활짝 웃었다. 그 표정에서 새어 나온 공기가 상쾌하게 주변을 감쌌다. 여름날의 더위도, 육아의 피로도 넘어설 수 없는 행복이었다.
카페에서 두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유모차를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막연히 엄습하던 불안감이 딸의 기대와 응원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잠시 멀어졌으나, 인생의 길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오늘이 아니어도 좋다.
어떤 오늘을 살든, 나의 내일은 언제나 맑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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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