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
* 혹시 모를 불편함을 드리지 않기 위해 먼저 말씀드립니다.
『내멋대로 심리학』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심리적인 시선과 저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성향을 비방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왜 그런 말이나 행동을 했을까?’라는 물음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심리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타인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고찰의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회사동료 J와 차 한잔 하다가 요즘 보는 연애프로그램에 나온 사연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J: 글몽씨, 요즘 연애프로그램들 진짜 많지 않아요? 답답하기도 한데 재밌어서 계속 보게되는거 같아요.
나: 아 그쵸. 보다보면 저의 지난 연애는 어땠나 생각해보기도 하고 재밌는거 같아요.
J: 그러니까. 근데 남의 연애는 훈수두기 참 좋은데, 막상 내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론으로는 전문가수준인데 ㅎㅎ
나: 그러게요.
J: (핸드폰을 보며) 아 정말..
나: 무슨 일 있으세요?
J: 아.. 아니 글몽씨 내 친구 이야기인데 친구가 남자친구랑 만나다보면 너무 즐겁고 좋대요. 그런데 사소한 습관들? 때문에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 어떤거 때문인데요?
J: 뭐 예를 들면, 약속장소나 시간을 정하는것도 다 그 남자가 마음내키는대로 정한다거나 연락도 본인이 하고 싶을때만 한다거나 그런것들이래요.
나: 그런부분은 서로 조율을 해야하는데 J님 친구분이 많이 맞춰주시나보네요.
J: 그런가봐요. (목소리가 점점 커짐) 근데 그런 상황이 어쩌다 한번이면 몰라도 꽤 자주 그러는게 문제죠. 다 같은 직장인이고 바쁜데 서로 배려해서 시간 맞추고 그러는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일하다보면 누구나 바쁘지 회사일 혼자 하는것도 아닌데 출근때 잠깐 연락했다가 퇴근하고 집에가서야 연락이 오고. 점심시간이나 화장실 갈 시간은 있잖아요. 저는 이해가 안돼요.
J는 친구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감정이입하는거나 목소리의 흥분도를 보았을 때, 본인의 경험을 말하는듯 보였다.
나: 음.. 친구분이 남자분에게 그런 부분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보는게 좋을 거 같은데, 그러진 않으시나봐요?
J: (머뭇거리며) 아, 대화는 해봤..겠죠? 그래도 안고쳐지니까 저한테 고민을 털어놓나봐요.
J는 대화를 급히 마무리 지었다.
나는 상대가 고민이나 문제가 있어보여도 다가가 먼저 물어보지는 않는다. 말하기 꺼려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다.
J와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며칠 후, 화장실에서 마주친 J의 안색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눈도 부어있는 듯 했고, 방금 눈물을 흘린 것 같았다.
걱정이 된 나는 컨디션이 괜찮냐는 말을 건냈는데, 그 순간 다시 J는 눈물을 흘리며 황급히 화장실을 나갔다.
J는 복도에서 다시 마주친 나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J와 나는 동갑이지만 J가 입사선배이기 때문에 서로 말을 놓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 좋아하는 취향이나 취미가 비슷해서 종종 업무 이외의 이야기도 잘하는 사이랄까. 동료와 친구 그 중간지점에서 우리는 좋은 사이를 유지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무튼, J가 안색이 안좋아서 마음이 쓰였지만 눈물을 흘릴 정도의 일이라면 더더욱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메신저 알람)
J: 글몽씨, 아까 화장실에서 내가 울었던건 그냥 잊어주세요. ㅎㅎ 괜히 민망하네.
나: 어디 많이 아픈건 아니죠? 안색이 안좋아서 걱정이 돼서요.
J: 솔직히 괜찮진 않은데 내가 좀 진정되면 글몽씨한테 이야기 해줄게요.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에서 나보다 앞서 걸어가는 J를 보게 되었다. 평소 걸음이 빠른 그녀인데 그날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마치 내가 회사 출근할 때 정문에서 머뭇거리듯)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J에게 퇴근 잘하고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며 지나갔는데 J가 간단하게 저녁 괜찮냐고 물었다.
J: 퇴근길에 갑자기 미안해요. 글몽씨. ㅎㅎ
나: 괜찮아요! 우리 종종 저녁도 같이 먹었잖아요.
J: 그래도 갑자기 말해서 당황했을거 같아서요. 우리 성향 비슷하니까 잘 알잖아요. ㅎㅎ
나: ㅎㅎ 그렇죠. 컨디션은 좀 나아졌어요?
J: 아까보단 진정은 됐는데 기분은 좀 슬퍼요. 사실 나 오늘 남자친구랑 헤어지러 가려고 하거든요. 꽤 오래만났고 여전히 많이 좋아하는 사람인데 만나고 집에 돌아가면 내가 초라하고 바보같이 느껴져요. 그래서 힘들어서 그만하고싶어요.
나: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J: 제가 남자친구를 좀 더 많이 좋아하는거 같거든요? 을의 연애라고 해야하나. 시작부터 제가 고백해서 만나게 된거라. ㅎㅎ 그래서 사귀게 됐을때 너무 좋았어요. 이상형이랑 만나게 되니까. 근데 연애하는 방식이 남자친구 위주로 돌아가니까 현타가 오더라고요. 약속시간이나 장소를 잡을때도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곳, 되는 시간에 맞추게 되고 본인 친구들이랑 약속이 더 우선이고 그 다음에 저랑 만나고.. (한숨) 그리고 연락이 잘 안되는게 가장 커요. 솔직히 저도 남자친구도 다 회사원이니까 일과중에 연락 계속 해달라는건 아니거든요? 근데 출근길 퇴근하고 자기전에 연락오고 그게 다인거에요.
나: 처음부터 그러신거에요? 아니면 서서히 그렇게 변하신거에요?
J: 처음부터 그랬어요. 제가 남자친구를 더 좋아해서 그런거 다 이해하고 맞췄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거 같아요.
나: 그래도 그런점은 대화를 해서 풀어가면 가능한 부분 같은데..
J: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대놓고 말은 못하고 서운한 마음을 말했거든요? 근데 저한테 그런것도 이해 못해주냐고 하는거에요. 그동안 그럼 이해하는 '척' 했던거냐면서. 오히려 저렇게 말하니까 제가 할말이 없어서 그냥 흐지부지 되버리더라고요. 저도 객관적으로 보면 왜 이렇게까지해서 연애하나 싶은데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남자친구를 좋아하니까 그게 어렵네요.
나: 그쵸. 관계라는게 서로 배려하고 맞춰야 하는건데 일방적으로 한쪽만 노력하면 금방 지치게 돼죠.
J: 그러니까요. 저도 제가 답답할때가 많아요. 떨어져있을때도 연락이 안되는데 그럼 만나서라도 잘하냐? 그것도 아니에요. 식당가서 메뉴 고르고 음식 나올때까지 계속 핸드폰만 보더라고요. ㅎㅎ 그래서 제가 너는 나를 좋아하는거긴 하냐고 물었는데, 안좋아하면 저를 왜 만나겠냐면서 제가 본인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것처럼 말하더라고요. 그럼 저는 또 할말이 없죠. ㅎㅎ
나: 본인의 성향이 어떤지 거울치료가 필요한 분이네요. 역지사지가 되어야 J씨의 마음이 어떨지 조금이라도 알텐데.
J: 그래서 남자친구처럼 똑같이 해본적 있거든요? 남자친구가 연락 잘 안되는거 화가 나서 저도 하루에 2-3번 메세지 보내고 약속 장소도 제가 편한곳으로 바꾸고 그랬는데 남자친구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게 아니라 저한테 화를 내더라고요. 연락을 왜 이렇게 뜸하게 하냐면서. 회사일 때문에 바쁘고 정신없었다고 하니까 회사일 네가 다 하냐면서 ㅎㅎ 본인은 다 이유가 있는거고 제가 하는건 배려가 없는거처럼 말하더라고요. 말하면서도 제가 왜 이런 연애를 계속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ㅎㅎ
J는 내가 아는 동료 중, 가장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타인을 쉽게 평가하지 않고, 남의 말을 전하지도 동조하지도 않는 신중한 사람.
이런 J의 연애고민을 듣는데 너무 마음이 안쓰러웠다. 저렇게 배려해주는 사람인데 왜 그만큼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걸까.
첫 번째, J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약속장소, 시간 등 본인에게 편한 것 위주로 정하며 친구들과의 약속이 우선순위가 되는 등 여자친구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역지사지가 되지 않으며 내로남불적인 모습을 보인다. 타인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은 참지 못하며 본인이 행동한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타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은 어떤 심리에서 발현되는 것일까?
P의 행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상대의 감정보다 자신의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태도다. 이러한 성향은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다’기보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취약함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기애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상대에게 맞춰주는 순간 내가 약해진다’는 무의식적 불안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태도로 감정적 주도권을 유지하려 하고, 상대의 요구나 불만을 ‘비난’으로 해석하며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특징은 자기애적 성격(Narcissistic)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겉으로는 자신감 있고 주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인정 욕구와 불안정한 자존감이 공존한다. 그래서 J가 섭섭함을 표현했을 때, 그것을 ‘비난’이나 ‘불복종’으로 받아들이고 역으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P는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데 불편함을 느끼는 회피형 애착 유형의 특징도 보이는 것 같다. 연인 관계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 있음’보다 ‘자기 공간’을 더 안전하게 여기는 듯 보이는데 아마 어릴 때부터 “감정 표현은 부담스럽다” 혹은 “감정은 약점이다”라는 학습을 한 경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P가 연락을 소홀히 하거나, 대화 도중에도 휴대폰에 집중하는 행동은 ‘관심이 없는 것’이라기보다 감정적으로 깊어지는 걸 회피하는 무의식적 방어일 가능성일 수도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P가 자신의 감정이나 타인의 감정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이는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적 특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거나,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 나타난다. 이들은 감정보다 논리나 상황을 우선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P가 J의 서운함을 ‘이해 못 해주는 행동’으로 치부한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인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P에게 연애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기보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것에 가깝다고 보이는데 연락 횟수, 약속 장소, 시간 선택 등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이유는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느낌을 통해 불안정한 자존감을 보상받기 위함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감정적으로 지치거나 관계를 끝내려 하면 그제서야 뒤늦게 불안과 상실감을 느끼는 특징을 보인다.
사랑은 결국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인 것 같다. 누군가는 주는 데 익숙하고, 누군가는 받는 데 익숙하다.
문제는, 한쪽이 계속 주고 다른 한쪽이 계속 받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때 생긴다. 한 사람은 자신을 잃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P와 J의 관계가 바로 그랬다.
P는 사랑을 ‘통제’의 언어로 표현했고, J는 그것을 ‘배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통제는 결국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배려가 지나치면 자신을 잃게 된다. 사랑의 본질이 ‘서로를 이해하고 성장시키는 힘’이라면, 그들의 관계는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 같달까. J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애썼고,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상대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이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삼키는 일이 반복되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습관이 되어버린다. 아마 J는 그 지점에서 지쳐버린 게 아닐까.
반대로 P는 어쩌면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고, 누군가의 마음에 완전히 기대는 걸 두려워했던 사람이다.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불안해지는 걸 견디지 못해, 결국 ‘거리두기’를 선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관계란 늘 두 사람의 이야기 같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우리는 나 자신과의 관계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아끼는 법,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만큼 내 마음도 살피는 법. J가 이번 이별을 통해 얻게 될 가장 큰 배움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된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성장이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잃어버렸던 시간도 결국은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한 여정의 일부였다고 믿고 싶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진짜 사랑은 나를 작게 만들지 않는다.” 그 말처럼, 사랑 속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용기, 그게 어쩌면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감정의 기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