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
* 혹시 모를 불편함을 드리지 않기 위해 먼저 말씀드립니다.
『내멋대로 심리학』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심리적인 시선과 저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성향을 비방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왜 그런 말이나 행동을 했을까?’라는 물음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심리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타인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고찰의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사례는 친구 L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한 내용이며, L의 동의하에 쓰인 글입니다.
L과는 5년 정도 알고 지냈다. 원래 내 친구의 친구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식사를 함께하면서 대화코드가 맞아 친해지게 되었다. 지금은 내 친구보다도 L과 더 연락을 자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를 설명하자면 화가 없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기복이 없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매사에 침착하며 무슨 일이 생기면 당황해서 허둥지둥하기보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될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너 T야?'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고 꽤나 감성적인 면모가 많다. 나는 L에 비하면 감정의 기복이 큰 편이고, 불안과 우울함도 꽤나 자주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L을 볼 때마다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L은 본인이 말하기를 자신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성에게 인기가 있을 스타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외적인 모습이나 성격 등 흔히 인싸의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그래서인지 늘 상대에게 헌신하는 연애를 해왔던 것 같았다.
술 한잔 마시며, 서로 지난 연애사를 이야기하다가 알게 되었다. 그는 상상이상으로 관대하다는 것을.
사람마다 연애에서 생각하는 '상식적'이라는 기준은 천차만별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L의 연애방식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L: 연애를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그동안 좀 쉽지 않은 연애를 해온 거 같긴 해(웃음).
나: 쉽지 않은 연애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내 기준에선 이해하기 힘든 거 같아.
사실 연애라는 게 당사자들만이 정확히 아는 것이라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 않은가.
무튼, L의 지난 연애사를 정리해 보자면
첫 번째, 애인이 있음에도 속이고 여러 명을 만나는 게 취미이며 들켜도 당당했던 사람
두 번째, 낭비벽으로 대출도 모자라 사채까지 쓰는 사람(L이 빚의 일부를 갚아줌)
세 번째, L에게 너 같은 사람은 재미없다며 헤어지지고 해놓고 술 취할 때마다 연락하는 사람
이 있었다.
저 중에 한 사람만 만나도 인생이 꽤나 고달플 거 같은데, 연애 경험이 많지도 않은 L에게 저 세 사람은 임팩트가 크다 못해 조금 오버하면 재앙 수준이 아닐까 싶다. 별 희한한 사연을 다 만날 수 있는 '연애의 참견'이라는 프로에서나 볼법한 연애 스토리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연애의 참견' 프로에서도 제3자가 보기엔 저런 사람과 왜 헤어지지 못하고 만나는 걸 고민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사연들이 태반이다. 근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저런 낌새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정이 떨어지거나 엮이기 싫어서라도 도망가려고 할 텐데, L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오히려 저 세 사람에게 매달렸다.
L: (과거의 세 사람에게)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어. 뭐 처음에 놀라긴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나와 함께 할 사람인데 내가 품고 가야지. 나는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른 사람들보다 넓은거 같긴 해.
나는 같은 말이라도 상대가 듣기에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L에게는 충격요법처럼 강하게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너는 저런 상황에서 화가 안나? 어떻게 그래? 한 명씩 봐보자. 우선 첫 번째 사람. 널 속이고 여러 명의 애인을 두면서 바람을 피우고 들키고도 너에게 당당했잖아. 근데 그게 화가 안나?
L: 물론 나도 사람이니까 순간 화가 나긴 하는데 그냥 내가 더 잘하면 되는 거 아닐까?
나: 그게 그럼 이해가 된다는 말이지?
L: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더 이해하고 노력하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거지. 그리고 첫 번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애정결핍이 좀 있어서 그런 거 같더라고. 부모님한테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해서 그런 거래.
나: (할 말을 잃음) 그럼 두 번째 사람은?
L: 그 사람도 어릴 때부터 돈에 얽매여서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해본 적이 없대. 그래서 성인이 되고 돈 벌면 원하는 거 다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으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도 해주고 싶어서 빚 좀 갚아줬지 뭐.
나: 그런데 결국 헤어졌잖아. 왜 그렇게 된 거야?
L: 응. 나는 빚 다 갚아주고 결혼하고 싶었는데 나한테 미안하다면서 죄책감이 든다고 하고 떠나더라고.
나: 돈은 다시 못 돌려받은 거지?
L: 그건 내가 그냥 갚아준 거니까..
나: 그럼 그 사람이 안 떠났으면 진짜 결혼하려고 했던 거야?
L: 그러려고 했지. 근데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나: 진짜 대단하다. 그럼 세 번째 사람은?
L: 뭐 전 애인들에 비하면 세 번째는 진짜 무난한 사람이었는데
나: 너의 무난하다는 기준이 대체 뭐야. ㅋㅋ
L: ㅎㅎ 그러게. 취미도 맞고 다 괜찮았어.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돈 문제로 신경 쓰게 한 것도 아니고.
근데 나랑 만나면 재미가 없대. 처음엔 편해서 만났는데 만나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더라고.
내가 더 재밌게 해 주겠다고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안되나 봐.
나: 근데 왜 술만 마시면 너한테 연락을 하는 거지? 그래 그건 뭐 술버릇이라 치자. 너는 왜 그때마다 불려 나가는 거니?
L: 술이 취했던 어쨌든 내가 생각나서 연락하는 거니까 모른 척하기가 힘들더라고. 그래서 나가는 건데 다시 만나자고 하면 그때는 알겠다고 하더니 다음 날 술이 깨면 연락이 안 되더라고. 그게 계속 반복이지 뭐.
나: 너는 이 모든 상황들이 다 이해가 되고 용서가 돼?
L: 화가 나긴 해도 그 사람들이 밉다거나 원망스럽진 않아. 그냥 내가 더 잘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뿐이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보통 사람들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범위가 넓은 거 같아. 웬만하면 다 이해할 수 있거든.
나: 너 그거 마냥 좋은 점이 아니야. 사람은 화가 나야 하는 상황에선 화를 내야 하는 건데 너는 그 마지노선이라는 게 없어. 그게 너 스스로에게 너무나 위험해 보여. 세상에 모든 걸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게 어디 있니. 범인류애적인 사람이야?
착하고 배려 잘하는 장점이 많은 L이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안타깝고 답답할 때가 많았다.
첫 번째, 자신의 외모나 성격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 본인을 항상 외모가 부족하고 매력이 없어서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어디냐는 말을 꽤 자주 했다.
두 번째, 자신은 남들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범위가 넓다고 생각한다. L스스로도 자신이 보편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 그것을 자신의 좋은 점으로 여기는 듯했다.
세 번째, 결핍이 있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자신이 품어주고 싶어 한다. 물론 어렵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길을 내밀수 있겠지만 L의 경우는 심리치료가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그저 자신의 사랑과 이해로 품어주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그게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간 만남을 이어가는 관계라면 결국 서로에게 파국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은 어떤 심리에서 발현되는 것일까?
연애 상대가 결핍이나 문제를 갖고 있어도, 그것을 이해하고 품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이는 자신의 심리적 경계가 약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행동이다. 즉, “내가 더 잘하면 해결될 거야”라는 생각은 상대를 돕겠다는 의도이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희생하며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기희생 경향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L은 스스로 외모나 매력에 대한 자신감이 낮다. 이는 자기 개념과 자기 효능감의 격차에서 비롯될 수 있다. “나는 매력이 없으니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라는 질문은, 외부 평가보다 내적 기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검증하는 내향적 성향과 연결된다. 이런 불안은 동시에 타인에게 헌신적 행동으로 나타나며, ‘내가 사랑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L은 위기 상황에서도 화나 당황을 잘 드러내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한다. 이는 정서적 안정성이 높은 특징이지만, 동시에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억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화나 분노를 적절히 표출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L이 어려운 상대를 이해하고 품으려 하는 행동은 단순한 친절이나 배려가 아니라, 심리적 결핍이 있는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로 해석 가능하다. 상대에게 안정감을 제공하고 관계 유지 능력이 높은 장점이 있으나 반복적 상처나 과도한 감정적 부담과 자신을 보호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L을 보면, 그는 분명 흔한 사람이 아니다. 침착하고 관대하며 타인의 결핍을 이해하고 품으려는 마음은,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쉽게 따라 하기 힘든 경지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방식에는 위험과 한계도 숨어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상대를 지나치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는 장기적으로 자신을 지치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L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해낸다. 화가 나고, 불편하고, 답답할 법한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방식을 지키며 관계를 이어간다. 나는 그 모습에서 신기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결국 L의 성향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편적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타인의 결핍을 품고 이해하려는 능력이 남다르지만, 그게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관계에서 그의 방식이 어떻게 작동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건,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며 깨닫는다. 모든 사람이 L처럼 넓은 마음과 깊은 이해를 가질 필요는 없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도 않다. 하지만 L 같은 사람을 관찰하면, 인간관계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존재하며, 때로는 우리가 상식이라 생각하는 선과 다르게 흘러가는 관계 속에서도 나름의 논리와 이유가 숨어 있음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세계를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은, 동시에 내가 가진 감정과 한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다.
그의 방식은 모두에게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끝까지 이해하고 품으려는 태도’는,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