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학교 가야지! 일어나! 지각하겠다!]
‘학교? 회사가 아니고? 아직 꿈인가..’
꿈에서 덜 깬 것 같아 눈을 더욱 질끈 감고 자려고 하는데 다시 귓가에 울리는 엄마의 목소리.
[이 녀석! 아직도 안 일어났어? 오늘도 지각하면 선생님한테 혼나잖아!]
‘선생님? 난 분명 회사원인데 왜 자꾸 학교에 가라고 하시는 거지?’
몽롱한 상태로 반쯤 눈을 떴을 때 나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침대, 책상, 벽지색깔, 심지어 내 몸 까지도.
그렇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침대 머리맡에 붙여진 덴버 판박이 스티커와 볼펜으로 쓴 내 이름이 보였고, 책상에는 그림과 함께 ‘1997 경제위기! IMF’이라고 적힌 전단지가 있었다.
몸에 전율인지 소름인지 모를 떨림을 느끼며 화장실로 갔는데, 세면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1997년, 초등학교 3학년의 나였다.
늘 상상했었다.
과거로 돌아가면 지금의 경험으로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고. 더 이상 미래의 내가 처량하게 살게 하지 않겠다고.
완벽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 일이 일어났다. 지금 거울에 비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드디어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간절하게 바라면 온 우주가 돕는다더니.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과거로 돌아온 후, 처음엔 마냥 즐거웠다.
젊은 부모님과 마주하는 것, 어리광을 부려도 이해받을 수 있는 나이라는 것, 이미 경험했던 것을 교훈 삼아 실수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더 짜릿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계획대로,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일까.
과거로 돌아오면 마냥 청사진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브레이크가 걸렸다.
어른이었던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렸던 신(新) 문물들.
아이폰, 맥북, 자동차는 1997년 현재의 나에겐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무엇보다 등굣길에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은
지루하고 답답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아.. 엊그제 놓친 드라마 유튜브에 올라와 있을 텐데.’
‘맥북 A/S 맡겨야 하는데.’
‘정비소에 자동차 수리 맡긴 거 찾아와야 하는데.’
내 머릿속은 지난날 내가 누렸던 문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되뇌다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버벅거리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분신사바 해보자. 이거 하면 정말 미래를 알 수 있대!]
왕눈이 초롱이를 보니 반가우면서도 어른인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져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눈앞에 초롱이는 내 옆자리에 앉은 짝꿍 그 자체였다.
[분산사바? 그거 귀신 불러서 하는 거? 근데 정말 미래를 알 수 있대?]
[귀신이 오면 O, X로 대답을 해준대. 제일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는데 미끄럼틀 위에서 할까?]
친구들은 분신사바에 심취해서 종알종알 얘기하고 있었다.
‘분신사바..ㅎ 그때 귀신이 나는 미래에 부자가 될 거라고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주식정보나 알려줄 것이지 귀신은 개뿔 ㅎ'
추억의 놀이를 다시 하게 되니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이미 어른의 정신을 가진 나는 금세 시들해졌다.
수업이 시작됐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몇 년 전 부고 소식을 들어 장례식에 갔었는데, 젊은 선생님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로 돌아와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같다.
한참을 뭉클한 기분에 젖어 있는데 선생님이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자, 어제에 이어서 장래희망에 대해 발표해 보겠어요.]
‘장래희망? 내 장래희망이 뭐였더라..’
장래희망이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느껴져 한참을 머뭇거리자 선생님께서 말을 이어가셨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니?]
선생님의 질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그럴듯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본 나에게 어릴 적 꿈은 그저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저는 하고 싶은 건 없고 그냥 부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일 안 하고 취미생활하면서 편하게 살면 좋지 않을까요?]
지극히 현실적인 답변을 내뱉고 선생님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마치 회로를 벗어난 로봇을 보는 연구원처럼 당황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품이 훌륭하신 선생님은 애써 나의 답변을 잘 포장해 보려고 계속 질문을 이어가셨다.
[그래, 부자가 되어서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것도 좋지! 혹시 하고 싶은 직업은 없니?]
[음... 그냥 카페 하나 차리고 싶어요. 회사원으로는 못살겠더라고요. 아.. 아니 회사원은 뭔가 피곤하잖아요.]
선생님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시며, 나중에 카페 차리면 꼭 들르겠다고 말하며 서둘러 마무리하셨다.
그냥 건물주나 돼서 월세 받고 사는 게 꿈이라고 하려다가 말았는데 그나마도 잘 둘러댄 것 같다.
초롱이는 큰 눈으로 이리저리 나를 살펴보며 물었다.
[너 카페 주인이 꿈이야? 뭔가 어른 같아~ 나는 카페 가본 적 없는데. 거기에도 과자 같은 거 팔아? 문방구나 슈퍼주인이 낫지 않아?]
나는 순수한 초롱이의 말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초롱아, 그럼 너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문득 초롱이의 꿈이 궁금해졌다.
[나? 나는 피아니스트 되고 싶어. tv에서 보는데 너무 예쁘더라.]
'지금쯤 초롱이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원하는 대로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으려나, 아니면 피아노 학원 원장?'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친구들과 분신사바를 하기 위해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엔 미끄럼틀과 정글짐, 오두막 같은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소꿉놀이하던 추억이 생각나 마음이 울컥했다.
[우리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서 하자! 제일 높은 곳에서 해야 귀신이 잘 찾아온대!]
초롱이의 확신에 찬 눈빛에 우리는 미끄럼틀 위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O, X가 그려진 하얀 종이와 볼펜,
귀신을 맞이할 친구 두 명과 구경꾼들까지!
모든 준비는 끝났다.
초롱이는 자세히 알고 있는 듯 설명하며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볼펜을 둘이서 잡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분신사바~ 분신사바~ 하는 거야.]
생각해 보면 볼펜을 움켜쥔 손은 O, X 중 듣고 싶은 대답으로 갔던 것 같은데 친구들은 사뭇 진지하게 임했다.
초롱이가 질문을 시작했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귀신님 오셨나요? 오셨으면 답을 주세요.]
정적이 흐르고 볼펜을 움켜쥔 손이 O를 향해 갔다.
[왔나 봐!! 우리 돌아가면서 궁금한 거 물어보자!]
[좋아! 내가 먼저 질문할게. 저는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될 수 있나요?]
초롱이는 미래에 자신이 뭐가 되어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렸는지 모르지만 볼펜은 천천히 X를 가리켰다.
[나..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나 봐.. 어떡하지..]
시무룩해진 초롱이는 의욕을 잃은 것 같았지만 금세 다른 친구의 질문에 집중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할게. 제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친해질 수 있을까요?]
볼펜은 O를 가리켰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구경꾼들은 너도나도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이 지루한 의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쉬고 싶었다.
친구들이 질문하고 귀신님이 답해주는 Q&A시간이 거의 끝을 보일 무렵 내 순서가 되었다.
[너도 질문해! 네가 마지막이야!]
‘무슨 질문을 하지.. 과거로 온 이유? O, X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하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 의식에 동참하고 진지하게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나중에 부자가 되나요?
이건 너무 뻔한 질문이지. 그리고 예전에 이미 했던 질문이고.’
시간을 끌자 친구들이 지루해하는 눈빛을 보냈고, 무언의 압박감과 부담을 느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지금 여기가 현실이 맞나요?]
내 질문을 듣자 친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게 뭐냐며 시시하다고 웃었다.
그런데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볼펜은 빠르게 회전하면서 X를 가리켰고,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볼펜이 떨어질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볼펜을 잡으려고 하다가 미끄럼틀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벌써 땅에 떨어져야 할 시간인데,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 소용돌이 같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출처: 구글이미지
'그래, 아직 꿈에서 깨지 않았나 봐. 너무도 생생한 꿈에서..'
의식이 희미해지려고 할 때 눈부시게 하얀빛이 내리쬐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주위에서 갑자기 시끄럽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일어나세요!! 정신이 드세요?]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어.. 르신이라고?’
또 이상한 날이 시작되었다.
*글 쓰는 몽상가 LEE의 메시지:
<어느 날>은 시간 이동에 대한 몽상을 옮긴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과거를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해요.
미래를 알 수만 있다면 대비해서 완벽한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상상해보기도 하고요.
저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과거형 환자'에 속하는데,
그러다 보니 현재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늘 후회와 아쉬움만 늘어나게 되더라고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습관이 돼버린 것 같아요.
지금의 제 모습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미 지나온 시간은 바뀌지 않고 그 시간들이 쌓여 현재의 제가 된 것이니 그것 자체에 가치를 두어야겠죠.
시간이동에 대한 몽상을 하면 마치 정말 과거로 한번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현재를 리프레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도 잠시나마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 드셨으면 좋겠네요.
몽상 인사이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