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 [심심한 심리노트]는 겹겹이 쌓인 마음의 깊이를 심심(甚深)하게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심심(心心)하게 스치는 감정 또는 사색을 담는 에세이입니다. 주로 심리를 주제로 한 영화 혹은 책 등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어떠한 울림을 받았는지 기록하고자 합니다.
최대한 영화 혹은 책 등 작품에 대한 줄거리나 설명은 간략히 할 예정이지만 일부 내용이 스포가 될 수도 있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어떤 시대의 불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기처럼 퍼져 있고 피부로 스며든다. 누구 하나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감각. 괜히 예민해지고 사소한 소리에 놀라고 이유 없이 피로해지는 상태. 오늘 소개할 파블로 피카소의 [Guernica(게르니카)]는 전쟁을 다룬 그림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단순히 한 도시의 폭격을 기록한 장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림은 외부의 사건이 인간 내부에 남기는 균열을 보여준다. 폭발은 바깥에서 일어나지만 파열은 안에서 지속된다.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피카소는 형태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한 화가였다. 그의 입체주의는 사물을 한 방향에서만 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가 폭격당한다.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도시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피카소는 이 사건 이후 거대한 캔버스를 마주한다. 가로 7미터가 넘는 화면에 색채는 배제되고 흑백만이 남는다. 그는 왜 색을 지웠을까? 피는 붉고 불은 주황일 텐데 그는 모든 색을 걷어냈다. 그 선택은 오히려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만든다.
색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장면을 미학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남는 것은 형태와 표정 그리고 일그러진 몸짓뿐이다. [게르니카]에는 폭격 장면은 보이지 않고 적도 등장하지 않는다. 화면을 채우는 것은 비명이다. 누가 가해자인지는 보이지 않지만 고통은 선명한듯 하다. 마치 전쟁은 특정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듯 그림은 원인을 지우고 결과만 남긴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정이 망가진 얼굴들이다. 눈은 과장되게 커져 있고 입은 찢어질 듯 벌어져 있지만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소리가 없는 비명의 침묵이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남는다.
화면 중앙의 전구는 이상하게 차가운 느낌이다. 빛은 있지만 따뜻하지 않다. 그 빛은 구원이라기보다 노출에 가깝다. 고통이 감춰지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태를 보여준달까. 전쟁은 어둠 속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밝은 이념과 명분 아래에서도 실행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피카소는 인간의 신체를 부순다. 팔은 분리되고 목은 비틀리고 몸은 조각난다. 형태는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마치 심리의 상태를 닮았다. 트라우마는 기억을 하나의 서사로 남기지 않는다. 순서 없이 떠오르는 장면과 과장된 감각, 설명되지 않는 공포로 남는다.
[게르니카]는 정돈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이미지들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은 그래서 전쟁의 기록이라기보다 집단적 신경계의 단면처럼 보인다. 그림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묘하게 차분해진다. 격렬한 장면인데도 색이 없어서인지 모든 것이 얼어붙은 순간처럼 느껴진다. 그 정지감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생각했다. 어쩌면 트라우마는 폭발하는 감정이 아니라 멈춰버린 감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울어야 할 순간에 울지 못한 표정, 도망쳐야 할 순간에 굳어버린 몸.
그 멈춤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게르니카]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부서진 채로 드러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봉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보고 난 뒤 세상이 안전하다는 말을 이전처럼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고 내 안에 남아 있는 작은 파열들을 대충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이 그림은 상처를 치유하는 법이 아니라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법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