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마당 시나리오 입문 21기_ [어떤 하루]를 주제로 이야기 쓰기
#1
“ 이봐 클락.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
제레미는 동료 의원인 클락에게 이야기를 한 후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 새로 발의된 법안에 대한 발언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제레미는 잠을 쫒기 위해 세수를 하고 무의식적으로 화장실 안의 라디에이터에 앉았다. 발언준비로 밤을 새 온몸이 피곤했던 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졸도에 가까운 잠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꾸벅 꾸벅 졸던 그의 귀에 고성방가가 들려왔다.
“쾅!쾅!쾅! 이 망할 호로 자식. 당신 화장실 전세 냈어? 적당히 했으면 나오라고”
귀를 때리는 갑작스럽고 시끄러운 소리에 제레미는 잠에서 깼다. 그런데 그 순간 제레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자기 혼자 밖에 없었던 화장실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차있는 것이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 게다가 의회 안에 있을 것 같지 않은 허름한 차림의 빈민들. 이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 나왔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다. 제레미는 벗어둔 정장 상의를 들고 사람들로 가득 찬 화장실에서 몸을 비벼대며 빠져나와 향하려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건물 안이어야 할 공간이 바로 외부로 연결되어 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놀라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화장실안에서부터 이어지던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화장실 밖까지 끝도 모르게 이어져 있다. 건물 안에 있던 화장실이 갑자기 왜 밖에 있는지 이해가 되기도 전에 줄지어 이어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의아함을 더 증폭시킨다. 제레미는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는 한 사내를 붙잡고 물었다.
“이봐요. 여긴 어딥니까? 난 분명히 내 사무실 화장실에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장을 입은 사람이 화장실이라니. 별일이군. 기자라도 되는 모양이신가? 하지만 기자를 하기에는 정신 상태가 영 정상이 아닌 것 같군.”
“기자? 아니요. 난 국회의원이요. 정장을 입은 사람이 화장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때 마침 줄어드는 줄 때문에 사내는 화장실 안쪽으로 대답도 없이 들어갔다. 덕분에 제레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사내가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장을 입은 사람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만들어진 것인가? 잠시 졸던 사이에 그런 일이 발생할리도 없고. 그전에 지금 여기는 왜 사무실 건물 안이 아니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상황파악이 안된 제레미는 어처구니없고 당황스러웠다.
“이봐 당신”
제레미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았다. 등 뒤에서는 벙거지 모자를 쓴 한 중년의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음을 좀 진정 시키고 주위를 둘러보게나. 내 생각엔 여기 이러고 서 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주위를 둘러보니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을 째려보고 있었다. 제레미는 시선을 돌려 의문의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사람들이 왜 날 쳐다보는 거죠?”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게 살던 세상과 시대를 벗어나보지 못하면 그 수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긴 하지. 무엇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잘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 입니까? 인간의 기본권? 보편적?”
“따라 오시게.”
#2
벙거지 모자의 중년 사내는 따라 오라는 말을 짧게 하고 등을 보이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의문의 사내였지만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 이 남자를 제레미로서는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제 갈 길을 가던 남자는 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된 전자기기를 수리하는 전파사. 제레미는 사내를 따라 가게로 들어서 문 앞에서 실내를 잠시 두리번거렸다.
“ 계속 그렇게 서있을 건가? 아무 곳이나 앉으라고.”
중년의 사내는 쓰고 있던 모자를 내려두고 토스트기에 식빵 2개를 넣으면서 제레미에게 말했다. 가게 안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주변에는 고친 것인지 고쳐야 할 것인지 모를 여러 전자기기들로 가득 차있다. 가운데 벽면에는 소파가 있고 가운데에는 의자들이 조금 너부러져 있었다.
“ 그러지요.”
제레미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 토스트 한 조각?”
“ 아니 괜찮소. 그보다 뭐 마실 것은 없습니까? 목이 타는군요.”
“ 방금 그 화장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나 보군. 오줌보가 터져 한 시간 넘게 화장실을 기다려도 괜찮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중년의 남자는 약간 비아냥거리며 말했지만 그 안에 의미심장한 언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제레미는 갑작스럽게 닥친 이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이 중년의 사내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짐작할 수 있었다.
“ 당신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말해주시오.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이곳에 와 있는 겁니까. 분명히 들어갈 때는 내 사무실 건물의 화장실이었는데 지금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요?”
" 일단 텔레비전이나 좀 보시게.“
텔레비전에는 뉴스가 틀어져 있다. 앵커는 그날의 이슈를 차례로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제레미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갑작스레 닥친 이 상황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을 여유나 마음가짐이 전혀 없다. 그렇게 제레미가 텔레비전을 외면하는 동안 화면에는 한 자막이 노출되고 앵커는 해당 자막에 쓰인 이슈에 관한 보도내용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뉴욕시 화장실 철거율 97% 도달. 연내 100% 도달할 듯. ]
“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보시오. 아까 화장실 앞에서 나에게 한 그 말은 어떤 의미요? 인간의 기본권? 평등?”
“ 후훗. 성격 급한 친구로구만.”
중년의 남자는 등을 돌린 채로 토스트를 집어 접시에 담으면서 제레미에게 대답했다.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남자의 태도에 제레미는 대답을 재촉했다.
“ 상황을 보시오. 이 상황에서 성격이 급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뭔가를 알고 있다면 제발 빨리 나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시오. 난 지금 무척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남자는 허리높이의 테이블위에 토스트가 담긴 접시와 땅콩 잼을 내려놓으면서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이프로 잼을 식빵에 바르면서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입을 벌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당신이 아까 이용한 화장실. 그 화장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아까 그 화장실 말이요? 그렇게 사람이 많은 화장실은 처음이었소. 하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 겁니까? 그 보다는 내가 지금 왜 이곳에 와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전혀 없는 겁니까?”
“ 무엇이 중요한 점인지 아직 잘 모르겠나보군. 당신이 그렇게 사람이 많은 화장실을 처음 보았다는 점. 그게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그걸 빼면 되겠는가. 생각해보게. 몇 평 되지도 않은 화장실에 도대체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줄지어 몰려있다고 생각하는가?”
“ 낸들 압니까. 저길 이용한 사람들이 줄지어서 로또라도 맞은 거요? 아니면 변기에서 금이라도 나오는 겁니까?”
“ 하하하. 참 그럴듯한 추리구만. 사람들의 행색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럴 만도 하군. 괜찮은 생각이야.”
“ 빨리 말해주는 게 좋을 거요.”
“ 사실 그 화장실은 뉴욕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화장실 중 하나야. 그 중에서도 꽤 큰 녀석이지.”
뉴욕에 화장실이 몇 개 남지 않았다고? 이건 무슨 난데없는 소리인가. 제레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다. 뉴욕시에 있는 화장실이 다 사라졌다는 이야기인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 몇 안되는?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졸고 있는 동안 시내에 있는 화장실이 다 없어지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 정확하게 그렇지.”
“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부탁이니 제발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해주시오. 내가 농담이나 듣고 싶어서 당신 따라온 게 아니란 말이오.”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제레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 텔레비전을 좀 보게. 자낸 텔레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남자는 그렇게 제레미의 눈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발걸음을 제레미 옆의 빈 의자 쪽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의자 위에 있던 리모콘을 손으로 집어 들고 그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남자는 텔레비전을 쳐다하면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 몇 년도였지. 2130... 아니 2140... 아 2143년 이었군.”
남자는 리모콘의 알 수 없는 버튼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텔레비전 화면에는 년도와 날짜가 나타나며 방송이 바뀌기 시작했다. 남자가 버튼을 계속 누르자 화면에서는 2143년의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고 화면안의 앵커는 당시 개발된 한 의학기술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화면 하단에는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 소변발생억제유도기술, 일명 피피리스 연구 개발 완료 단계.’
남자는 다시 재레미에게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2143년 인류는 더 이상 소변을 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됐다네. 이 기술 덕에 인간은 더 이상 오줌이 마려울 때 느껴지는 그 배출 욕구 자체를 느끼지 않게 했지. 더 이상 소변이 마려워서 안달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야.”
“ 잠깐, 잠깐, 2143년? 농담 좀 그만 하시오. 잠깐 졸고 난 사이에 시간이 그렇게 흘렀을 리가 없지 않소. 게다가 소변? 소변을 보지 않는다니 당최 그게 무슨 소리요.”
“ 갑자기 시간이 200년 가까이 흘러서 혼란스러운가? 말 그대로야. 지금은 2181년. 인류는 더 이상 소변을 보지 않아도 된다네. 기술이 개발된 지 40년 정도 된 것 같군. 이제 도시에서는 거의 화장실을 찾아볼 수 없어. 아까 그 화장실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은 그 때문이지. 자 보라고”
남자는 제레미에게 날짜가 찍힌 신문을 건내 주며 보여줬다. 2181년 10월 20일, 21일, 22일. 신문의 중앙 접히는 부분들이 헤져있다. 22일의 신문에는 좀 전에 제레미가 보지 못했던 뉴스의 보도내용, 화장실 철거율에 관한 기사가 1면에 담겨있었다. [ 뉴욕시 화장실 철거율 97% 도달 ] 이라는 헤드라인. 내용을 보니 뉴욕시의 화장실이 없어지기 시작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제레미는 혼란스럽다. 왜 자신이 200년 가까이 지난 시대로 갑자기 옮겨졌는지 알 길이 없다.
" 2181년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군요. 그럼 이 시대는 병원에서 소변검사 같은 것도 안한다는 겁니까? 도핑테스트는?"
" 오줌을 싸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그런 번거로운 일들을 과연 할 것 같은가? 요즘은 머리카락 하나만 뽑아도 웬만한 신체 상태나 병력을 다 확인이 된다네."
“도저히 모르겠군요. 내가 왜 지금 여기에 와있는 건지.”
남자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쪽으로 걸으며 제레미에게 물었다.
“자네는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기준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겁니까.”
“당신이 이곳에 옮겨진 실마리가 사실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 헌법? 종교? 돈? 과연 뭘까. 법 앞에 평등한가? 같은 종교를 믿으면 모두 같은 성숙을 이룰 수 있는가? 아니면, 똑같은 돈을 가진다면 20년 뒤에 똑같은 크기의 재력을 가질 수 있을까?”
제레미는 소파에 앉은 채로 허리를 반쯤 굽혀 말없이 남자를 그대로 지켜보았다. 창가로 향하던 남자는 창가 앞에 서서 뒤를 돌아 기대 다시 재래미를 바라보았다.
“ 당신 몇 년도에서 왔지? 옷차림을 보니 21세기 초반 인 것 같군, 어디쯤인가? 2010년? 2020?”
“ 마치 모든 걸 안다는 듯이 말하는 군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 잔말 말고 대답이나 하시게.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다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지.”
“ 2016, 아니 2017년이오. 이제 막 해가 바뀌었죠.”
“ 2017년이라. 가만있어보자. 당신 시대의 부자는 누가 있었나? 빌 게이츠? 만수르? 트럼프? 아, 트럼프는 이제 막 대통령이 됐겠군. 백악관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지 아마. 뭐 좋네. 트럼프라고 해보지.”
“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도통 모르겠소.”
" 혹시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자들 집의 화장실을 상상해 본적이 있나? 어떤 모습일 것 같은가?"
" 화장실? 낸들 압니까. 깨끗하고 고급스럽겠지요. 어쩌면 우리 집보다 클 수도 있겠군요."
“ 당신 집보다 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크게 만들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드는군.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트럼프가 혹여 자기 화장실 벽을 금으로 쳐 바른다고 한들 결국은 똑같이 오줌 싸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거지. 생각해 보라고. 어떤 부나 권력을 가지더라도 오줌 싸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 만수르도 변기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자기 고추를 꺼내 체액을 배출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다시 말하면, 오줌 마려운 그 다급함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인류라는 사실이지. 당신 시대는 꽤 평등한 사회라는 말이야.”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문제 앞에 제레미는 당혹스럽다. 오줌이라고?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왜 이 더러운 오줌에 대해 철학적 사고를 해야 하는지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까. 어마어마한 부자가 있다고 치지.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지금 당장 바지를 내리지 않는다면 오줌보가 터져버릴 것 같은 지경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거리에는 놀이공원의 밀집도 만큼이나 사람이 많아. 그런데 왜인지 그는 지금 빈민가에 와있어. 그리고 그 빈민가의 참 허름한 화장실 앞에 서있지. 마치 시험받는 듯한 기분으로 말이야. 아마 ‘내가 이런 더러운 화장실에서 용변을 봐야하다니’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군.”
“ 참 더러운 이야기를 잘도 해대는 군요.”
“ 아마 냄새나고 더러운 그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싶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대안은 없어. 그렇다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길에서 오줌을 쌀 수는 없지 않은가? SNS에 라도 올라가면 어쩌지? 명성이 하루아침에 추락할 수도 있다고. 짧은 생각이 스치기는 하겠지만 내 생각에 그는 그 더러운 화장실에서 아마 용변을 볼 수밖에 없을 거야. 주변에 화장실이 거기 밖에 없다면 말이지. 그 순간 그는 단지 오줌 앞에 굴복한 한 마리 어린 양에 불과해. 돈이고 명예고 오줌 앞에서의 나약함은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지.”
“ 그렇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그 나약함이 해결 가능해졌다는 말이군요.”
“ 정확하게 짚었어. 이제 화장실은 더 이상 인류에게 필수적인 시설이 아니야.”
남자는 다시 리모콘을 들고 티비를 다른 시대의 다른 채널로 돌렸다. 2167년. 텔레비전에 화장실 철거문제에 대한 시사토론프로그램이 틀어졌다.
“ 기술이 개발된 후 20년, 정부는 점점 더 불필요해지는 화장실의 필요성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받게 되지. 웬만한 사람들에게 화장실은 더 이상 생활에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게 됐어. 자연히 그 필요성에 대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논의를 하게 됐지. 이용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화장실이 건물의 층층마다 공간을 차치하고 있을 자격이 있을까? 상당히 불필요하게 느껴졌겠지. 화장실은 점점 건물 안에서 없어지기 시작했어.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화장실이 없어진지 10년은 된 것 같군.”
“그럼 아까 화장실 앞의 그 사람들은, 기술의 해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겁니까?”
“언제나 사각지대는 존재해. 적당한 타협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지. 그건 사실 피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이 문제는 기존까지 유지되던 인간의 기본권 자체에 균열을 일으켜 버렸어. 이제 화장실은 혐오시설이야. 사회는 오줌을 싸지 않는 사람과. 여전히 오줌을 싸는 사람, 두 부류의 나뉘지. 노동자들은 물먹는 것도 조심해야하는 처지야. 내가 아까 당신에게 마실 걸 권하지 않은 이유였지.”
남자는 리모콘을 들고 티비를 껐다.
“ 현재는 단순히 소변의 문제지만 그건 어떤 생물학적 조건을 말하는 것일세. 생각해보게.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세상에서 인류 평등의 마지노선은 우리가 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 외에 없을지도 몰라. 그 외에 사회적인 모습으로의 인간은 이미 수많은 기회의 불평등과 보편적 인권의 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있지.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면 부자들은 하루의 24시간을 깨어있는 상태로 살아갈지도 몰라. 그 때 우리는 공평의 기준이 무엇인지 재정립하겠지. 더 이상 365일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시간이 되지 않게 되는 거야.”
제레미는 남자의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시선을 바닥에 두고 두 손을 모아 잠시간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벗어둔 모자를 다시 집어 머리에 썼다.
“ 이제 시간이 다 됐군. 마지막으로 묻지. 그렇다면 자네는 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는가?”
“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난 그저 화장실에서 잠시 잠들었을 뿐입니다. 어제 밤을 세서 연설문을 준비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죠. 그게 전부요. 눈 떠보니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단 말입니다.”
“ 내 생각에는 아마도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는 지금 당신이 직면한 그 문제 때문이야.”
“ 무슨 문제 말입니까!?”
“ 더 이상 자네에게 해줄 말은 없어. 그건 아마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걸세.”
남자는 말을 마쳤다. 그러자 그 순간 가게 안에는 어디에서 흘러 들어오는지 모르는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철퍽. 철퍽. 세차게 들어차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 그렇게 가게는 순식간에 수몰되어 갔다. 발목과 무릎을 거쳐 허리까지. 가게 안은 점점 더 물에 잠겼다. 제레미는 다급해졌다.
“ 이건 대체 어디서 들어오는 물이야? 당신 지금 무슨 수작이지!? 가만히 있지 말고 대답 좀 해보라고 !!”
남자는 제레미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처연하게 가게 뒤편의 어두운 곳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레미는 등을 보이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 기다려 !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누구 길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이요? 그렇게 다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면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알고 있는 것 아니요!!? 뭐라고 말 좀 해보란 말이야!”
남자는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지며 마지막으로 제리미에게 말했다.
“ 그건 당신이 얼마나 깨닫느냐에 달려있어. 나의 소관이 아닐세. 그럼 살펴 가시게나.”
“ 이보시오 !!!”
차오르던 물은 제레미의 턱끝을 넘어 머리까지 넘어섰다. 제레미는 완전히 물에 잠겼다. 호흡은 점점 더 사라졌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 자신을 찾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 제레미.”
“ 제레미~”
“ 제레미!!”
#3
“ 제레미 !!! ”
“ 안되 !! ”
제레미는 심하게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물은? 남자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주변은 다시 화장실이다. 조용한 화장실. 자신이 앉아있던 라지에이터 옆에는 벗어둔 정장이 있다. 눈앞에는 클락이 서있고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
“ 뭐가 안 된다는 말이야? 꿈이라도 꾼 건가? 여기서 잠들어 있으면 어떻게.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더니만 돌아오지 않기에 와보았네. 어서 들어와. 이제 곧 당신 차례야.”
“ 뭐, 내 차례? 하아... 그렇지... 곧 내 발언 차례였지. 휴... 물에 빠져 죽는 꿈을 꾸었어. 그것보다 더 괴기한 일도 있었지만...”
“ 에휴, 정신 차리고 어서 들어오게. 이러다가 늦겠어.”
제레미는 벗어둔 정장 상의를 들고 일어났다.
“ 그런데 클락, 발의된 법안이 뭐였지?”
“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밤새 준비한 걸 그새 까먹은 건가!? 자. 자네가 준비한 연설문이야. 빨리 다시 훑어보게나.”
클락이 건네준 제레미의 발언 준비 정리 서류의 최상단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생명윤리법 폐지와 관련한 법안발의에 관한 연설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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