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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유지비

내 인생의 재무제표엔 지금 취양유지비 항목이 없다.

by 글객

품위유지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정확한 개념을 알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육군사관학교 등에 재학 중인 생도들에게 월에 한 번씩 지급하는 돈이라고 한다. 실제로 생도들 각자가 정확히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비장교들이 군인의 외적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은 군이라는 집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일 인가보다. 차량이 차량으로서 꾸준히 재기능을 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수리를 하고 소모품을 적시에 갈아주는 비용을 차량 유지비라고 하는 것처럼 품위유지비란 군인 집단이 대외적으로 꾸준히 신뢰감 있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일 것이다. 유지비용이란 어떤 객체의 정체성 훼손을 막는데 들어가는 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이 계속해서 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비용은 무엇일까. 지금껏 지켜온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 그것은 취향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취향이 있다. 누구는 아이돌 음악을 좋아하고 누구는 힙합 음악을 좋아한다. 같은 아이돌 음악을 좋아해도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지도 모두가 다를 것이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이 몸에 잘 맞는지, 지하철을 선호하는지 버스를 선호하는지, 커피가 나은지 티가 좋은지, 하나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취향은 가치관이라는 원인이 만들어내는 한 사람의 쏠림현상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란, 수 만 가지의 차원으로 되어 있는 가치관의 좌표계에서 특정한 지점으로 존재하는, 말하자면 다양한 가치관의 응집체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존재하는 그 고유한 좌표 지점을 잃지 않기 위해 취향에 투자한다.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혹은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지급되는 시긴이라는 자원을 할애함으로써 그 점이 발산하는 빛이 바래지 않도록 한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간다거나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을 산다거나, 특정 세그먼트의 차만을 산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다. 그 취향 유지비의 본질은 결국 자기 유지비다. 취향을 통해 자기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계속해서 나 자신일 수 있도록 하는 투자. 그런 면에서 소비는 자기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행동인 것 같다.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말이다.


나에게는 오래되고 친한 친구가 하나 있다. 지방에서 학교를 다녀 학부 1학년부터 자취를 해야 했고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어려워 끊임없이 과외를 해야 했던 친구다. 나는 그 친구가 20살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집을 가봤다. 한 때는 몇 개월을 같이 지낸 적도 있고 그 이후에는 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며 맥주 한 잔을 하기 위해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내 기억으로 그 친구는 십 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못해도 대여섯 번은 이사를 했는데 사는 게 녹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집은 항상 그의 취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아날로그 사진기를 모을 때도 있었고 서로 다른 목적의 자전거를 몇 대를 사기도 했다. 언젠가는 커피 머신으로 캐러멜 마끼아또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맥주를 마시기 위한 다양한 종류의 독특한 주전부리들은 상비약처럼 선반 등의 공간에 언제나 존재했다. 그의 집에서 친구들끼리 만나 한 창 대화를 이어나갈 때면 침대 밑에서 그 십몇 년의 세월을 함께한 그의 반려묘가 스윽 밖으로 나와 우리들에게 교태를 부리고는 한다. 그 친구는 반년 전 즘 평수가 넉넉한 원룸형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며칠 전 나는 그의 집에서 와인을 마셨다. 여태까지의 그의 집 중에서 가장 넓은 평수인 지금의 집에는 지금껏 쌓여온 그의 취향들이 고스란히 그 공간에 담겨있었다. 그는 그의 공간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반면에 나는 그의 대척점에 서 있다. 소비 지향적이지 못한 나의(내 친구가 소비지향적인가 아닌가 와는 무관하다.) 주변에는 나의 취향을 대변할 만한 것들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근 몇 년 간 크게 돈을 쓰며 옷을 산 기억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스스로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멜론 플레이어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 말고는 별로 음악에 투자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가 본다거나 하는 것도 없고 문화소비도 크지 않은 편이다. 정말이지 요즘에는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걸 빼면 유튜브를 보며 맥주 한 캔 하는 게 유일한 취미활동인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얻어온 물건들과 선물 받은 것들로 채워진 내 방안은 취향에 소비할 줄 모르는 나란 사람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이 전혀 없다거나 해보고 싶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덜 소비적인 것만은 사실이나 나에게도 그런 기본의 욕구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비 소비적인 나날들을 조금은 견디며 지내고 있는 이유는 현재의 내가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 때문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순수한 나만의 공간. 그 선결과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여전히 내 취향에 투자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조금이라도 빨리 공간이라는 물리적 존재를 통해 자기 자립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다.


우려되는 지점도 있기는 하다. 앞서 말했듯이 취향에 투자하지 못한다는 것은 가치관의 좌표계에 독특하게 존재하는 나라는 좌표가 발산하는 빛이 바래지는 일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의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원했었는지 가물가물해질 때가 많다. 나 자신을 잃은 느낌이랄까. 나 만의 공간이라는 최우선의 취향을 하루라도 빨리 얻어내기 위해 그 이외의 다른 취향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연속된다고 할지라도 공간적 자립이라는 인생의 숙제를 풀기 전까지는 내 취향을 잠시 뒤로 미루며 살 것만 같다. 그 선결과제가 나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공간을 얻어내기 이전까지는 내 인생의 재무제표엔 취향 유지비란 항목이 새롭게 개설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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