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아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것의 백지 한장의 차이
점점 더 어른이 되면서 아는 게 많아지고 알아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같은 종이에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같다. 나이가 어릴 때는 아는 것이 적을지언정 내가 무엇을 아는지가 선명하다. 흰 종이에 그림이 하나이면 그 그림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백은 선을 선명하게 한다. 종이를 채우는 선들이 이루는 어떤 그림은 공백으로 인해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해진다. 그것을 통해 내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선명해진다.
그러나 나이를 한 두 살 먹으며 넉넉했던 종이는 계속해서 매워진다. 빈틈을 채우고 채우다 보면 종이의 지면은 점점 더 촘촘해지고 각각의 그림은 그 종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서로 간에 변별력을 잃는다. 그리고 급기야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선과 선이 겹쳐지며 서로의 영역이 중첩된다. 아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간섭. 아는 것은 점점 더 많아지지만 그것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워지기도 하고 무엇이 옳은 것이었는지 헷갈릴 때도 있다. 알던 것은 새로이 알게 된 것으로 인해 가치가 재평가되고 그들 사이를 제대로 가치를 평가하지 못하거나 인과 관계를 찾지 못하거나 상관관계를 규명해내지 못하면 뭔가를 아는 것이 몰랐던 것만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새 하얗던 도화지가 그런 수많은 그림들로 가득 차 빈틈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면 내가 무엇을 아는 것인지 무엇을 모르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의 순간이란 그런 새카만 도화지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새하얀 도화지가 새카매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는 것, 그것이 인생이자 어른이 되는 것의 잔혹함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