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점령

[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_episode_4 ]

by 글객
7/27(월) - DAY 1_3


#8


버스정류장에서 숙소는 멀지 않았다. 큰길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3분 정도만 걸어가면 삼일 밤을 묵을 첫 번째 숙소인 리조트가 보였다. 리조트의 마당에는 렌터카로 보이는 차량이 네다섯 대 정도 주차되어 있었다.


건물은 총 두 동으로 입구에서 가까운 쪽의 건물에 체크인 데스크가 마련되어 있었다. 리조트는 식당도 같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A동의 1층이 식당이자 체크인 데스크였다. A동 출입구에서 체크인 데스크까지는 완전히 펼쳐진 박스들이 길을 만들며 살짝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 안녕하세요. "


체크인 데스크에는 어려 보이는 한 사내가 앉아있었지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내쪽이었다. 스마트폰을 보며 앉아있던 사내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과 인사말에 살짝 놀란 듯 보였다.


"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


사내는 내 이름을 듣고서는 잠시 동안 예약목록을 확인했다. 외국계 사이트에서 숙소를 예약한 나는 예약자 이름이 영어로 되어 있음을 알았기에 사이트 이름을 말해주며 추가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추가적인 정보가 내 예약현황을 찾는데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으나 사내는 곧 내 이름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B동 1층에 있는 숙소로 나를 안내했다. B동은 체크인 데스크가 있던 A동과 마찬가지로 복도에 박스가 일렬로 깔려있었다. 비 오는 날씨에 복도가 물로 범벅이 되지 않도록 깔아 둔 것이라지만 박스들이 이미 많이 축축해져 있어 지저분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박스들을 밟으며 사내의 뒤를 졸졸 따라가자 그는 복도 끝에서 내가 지낼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 카드 키 꼽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


사내는 간단하고 명료한 문장의 안내말을 남긴 후 방문을 닫았다. 그의 말대로 카드키를 벽에 꼽자 방 이곳저곳에서 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9


김교석 씨의 저서 '오늘도 계속 삽니다.'라는 책이 있다. 제목 중에서 '삽니다'란 말 그대로 물건을 계속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비의 미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값이 조금 나가더라도 좋은 물건과 장비를 시의 적절하게 구매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이 집이라는 공간에서 진정한 휴식을 맞이하고 일상의 안온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맞지 않는 신발을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사서 신으면 정작 발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신발 본연의 기능이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아무것이나 대충 저렴한 걸로 채워진 집은 '일'이라는 전투를 치르고 온 주인의 내면을 깊게 치유하지 못한다. 저축을 통한 생활 자본 마련이라는 미명 아래 굉장히 비소비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작은 충격이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나의 일상을 조금 변화시킨 책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책은 카테고리별로 좋은 물건을 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좋은 브랜드를 추천한다. 이를테면 좋은 수건을 써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이다. 흡수력이 좋지 못한 수건은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에게 샤워 후의 안락함이라는 기분을 제대로 선사하지 못한다. 미진한 흡수력으로 인해 수건이 샤워 후 몸에 남아있는 물기를 제대로 닦아내지 못하면 수건을 한 장 더 써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고 물기가 다 마를 때까지 옷을 입지 못하거나 소파나 침대 등에 바로 몸을 뉘우지 못하는 불편함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샤워타월을 집에 비치해 둘 것을 추천하기도 하고 어떻게 수건을 관리해야 흡수력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제대로 된 물건만을 자신의 공간에 허락시키는 작은 노력들이 쌓이고 쌓이면 집이라는 공간은 마치 수많은 적군의 농성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철옹성과 같은 정서적 안식처로 거듭나게 된다.


여행에서의 숙소는 그 기간만큼은 여행자에게 집과 같다. 여행은 일상과 대비되지만 그 속에는 일정과 휴식이라는 또 한 번의 구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얻은 심신의 피로를 회복시키는 것이 집의 역할이라면 여행자의 피로를 씻겨주는 것이 숙소의 역할이다.


사내가 문을 닫고 사라진 후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숙소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방 안에는 더블침대와 싱글 침대 하나가 약간의 간격을 둔 채 놓여 있었고 더블침대 쪽에는 벽 전체를 차지하는 샤시가 있었다.


싱글 침대 뒤편에는 세로로 긴 창문을 완전히 내려간 블라인드가 가리고 있었다. 그 블라인드의 끝이 만나는 창문의 턱 부분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수건 한 장이 깔려 있었는데 조금 지저분한 느낌이 있어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침대의 정면에는 TV와 에어컨, 냉장고가 있었고 TV 아래로는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폭이 좁고 긴 형태의 가구가 냉장고를 감싸며 벽에 붙어있었다.


현관 쪽의 모습은 방 중앙에 들어오고 나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현관에 들어왔을 때 바로 왼편의 벽 상단에는 옷가지를 걸 수 있는 행거가 있었고 행거에는 충분한 수의 옷걸이가 준비되어있었다. 바닥에는 역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선반 형태의 가구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그 아래로 실내용 슬리퍼 두 족이 놓여있었다. 발등 부분에 큼지막하게 SKY라고 쓰여있는 어두운 회색 계열의 실내화는 적잖이 촌스러워 보였다. 얼마 전 여자친구와의 여행 때 다이소에서 구매한 실내화를 이미 꺼내 신고 있었기 때문에 체크아웃을 할 때까지 해당의 실내화를 신을 일은 없었다. 행거와 선반 사이에 위치한 배전함은 방이라는 공간에 존재하기에는 꽤 거칠고 투박한 모양새여서 숙소에서 지내는 내내 눈에 조금 거슬리는 존재였다.


이곳저곳에서 조금 엉성하거나 투박함이 묻어나는 숙소는 여행에서의 완전한 안온함을 느끼게 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수준이었다. 숙소를 예약할 때 보았던 사진과 방의 모습이 조금 달랐던 점도 아쉬움을 보태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샤시 밖으로 보이는 너른 들판은 사진에서 보던 모습과 같아 만족스러웠다. 부족한 측면들이 있긴 해도 사실 혼자서 지내기에 큰 무리는 없는 방이었다.


방의 이곳저곳을 눈으로 다 읽은 후 가방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꺼내 어울리는 공간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옷가지들은 옷걸이를 이용해 행거에 걸고 TV 아래에는 챙겨 먹어야 할 각종 비염 관련 약과 유산균, 로션과 선크림 등 화장품류 및 마스크를 꺼내 두었다. 에어컨 아래에는 노트북을 꺼내 펴놓고 전원 콘센트를 꼽았다. 휴대용 선풍기와 보조배터리, 블루투스 스피커 등 각종 전자기기류 들도 노트북 언저리에 두었다. 노트북 어뎁터를 꼽고 남은 콘센트 한자리에는 휴대폰 충전기를 꼽아 두었다. 방 전체를 통틀어 콘센트가 단 두 구 뿐인 것은 꽤나 아쉬운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세면용품들을 화장실에 가져다 두었다. 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누와 샴푸는 가져 오지 않았기에 칫솔과 치약만을 칫솔 통에 꽂아두었다. 칫솔꽂이는 벽에 고정되어있는 철재 프레임에 꼽혀있어야 하는 모양이었지만 프레임을 고정하는 나사 부분이 낡고 헐거워져 세면대 위에 따로 놓여있었다. 변기 위의 선반에는 여분의 휴지 한 롤과 수건이 두 장 놓여 있었는데 만약 김교석 씨가 이를 본다면 아쉬움을 금치 못할 것만 같은, 그런 빈약한 흡수력이 예상되는 파란색과 흰색 두 장의 수건이었다.



#10


여행의 첫날에는 처음부터 뭔가를 크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 이동이 있는 날은 여독을 풀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짐 정리와 샤워를 다 마친 후에는 적당히 쉬다가 밥을 먹으러 나갔다. 숙소는 말하자면 시골 쪽에 위치하여 주변에 끼니를 때울 장소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인 수원리 해안가에 음료와 음식을 모두 파는 카페가 있었다. 주변에 다른 카페는 거의 없어 보여서 이래저래 3박을 지내는 동안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요한 해안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도착한 카페 문 앞에는 쉬는 날이라는 아기자기한 입간판이 서있었다. 뭔가 고즈넉한 분위기에 걸맞은 나무로 된 입간판이었다. 스스로 서 있는 건 아니고 기대어져 있어서 '입'간판이라고 하기엔 조금 뭐한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당일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본연의 기능을 아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귀여운 글씨체의 입간판이었다.


그런 연유로 어쩔 수 없이 오던 길 중간에 보였던 우동집에 들어가 돈가스를 시켜먹었다. 공항에서 돈가스 덮밥을 이미 먹었었기에 또 먹기가 조금 그랬지만 우동을 먹기에는 배가 좀 덜 찰 것 같아 살짝은 마지못한 감정으로 돈가스를 주문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주문을 받고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하는 내내 주인 할머니가 영 말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손님이 주문을 하던, 물을 달라 하던, 짧은 대답 한 번 들을 수 없는 무뚝뚝한 사장님이었다. 그 무뚝뚝함을 넣고 돈가스를 튀겼는지 주문 끝에 나온 돈가스도 조직이 강해 먹기가 살짝 버거웠다. 조금 더 연하게 튀겨졌다면 훨씬 더 맛있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물론 제주 흑돼지를 사용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아쉬운 식감이었다. 같은 접시에 함께 나온 샐러드나 새우튀김 같은 반찬류는 '구색'이라는 말에 충실할 정도로만 깊이가 있는,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반찬들이었다.


식사를 다하고 나서는 편의점에 들려 필요한 것들을 샀다. 2L짜리 생수 한 병과 믹스커피 한 통 그리고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등 아침에 먹을 음식들도 샀다. 캔 맥주를 적당량 살까 살짝쿵 고민했지만 여행의 첫날부터 알코올 기운에 취하는 것은 뭔가 죄를 범하는 기분이 들어 고르지 않았다. 편의점을 나와서는 마치 동네에 마실 나온 사람처럼 구매한 물건이 담긴 검은 봉다리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 숙소로 돌아와 사 온 물건들을 냉장고와 선반에 정리하며 숙소 세팅을 완료했다. 혼자 쓰기에는 조금 넓은 더블 침대에 몸을 뉘인 상태로 리모컨을 붙잡아 TV를 이리저리 돌려 보다 보니 밤은 점점 더 깊어갔고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여행의 첫날을 마무리하는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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