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분을 잠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다시 한번 안내방송이 들리고 있었다. '우리 비행기는 곧 제주 공항에 도착합니다.'라는 평범하고 익숙한 방송 멘트는 잠을 조금 더 깨웠다. 졸음으로 인해 더 짧아진 것 같은 단시간만에 제주에 도착한 비행기는 탑승할 때와 반대 순서로 승객들을 내보냈다. 머리 위 짐칸에서 배낭을 다시 꺼내서 맨 후, 출구에서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건네는 승무원들에게 작은 목래로 답변하며 나도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위탁 수화물이 없었기에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공항을 빠져나오니 비행기를 타기 전과는 차원이 다른 물줄기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비가 많이 올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렇게 여행마다 자주 비가 올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사이즈의 빗줄기였다. 4년 전 홀로 제주에 올 때도 빗줄기와 함께 여행을 시작했고, 친구들과 캠핑을 할 때도 비가 왔던 기억이 많다. 20대 중반의 청평 캠핑에서는 미친듯한 폭우가 왔었는데 그로 인해 새벽녘에 4명이 일어나 비를 맞으며 텐트를 고지대로 옮겨야 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강물이 범람해 캠핑장으로 들어오는 다리가 물에 잠겨 몇 시간 동안 고립되는 경험까지 해야 했다.
21살의 경포대 캠핑에서는 도착하자마자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텐트를 쳤다. 그리고 같은 멤버들과 군 전역 이후에 갔었던 제주도 스쿠터 여행에서는 4박 5일 중 3박 4일이 비가 왔다. 비를 맞는 게 아픈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스쿠터 속도까지 더해진 빗줄기의 충격은 두장의 우의를 입어도 소용없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심지어는 몇 달 전에도 그랬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제주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거의 딱 여행의 시작 날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를 확인하여 모든 숙박과 렌트를 취소해야만 했다. 나는 친구들과의 여행 종료 이후로 개인적인 여행도 할 예정이어 스쿠터와 숙박 예약을 별도로 했었는데 이런저런 취소수수료를 다 합치니 그것만도 5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었었다. 그리고 그 여행을 못 간 것에 대한 보상 격이기도 한 이번 여행까지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물과 함께 시작해야 했다.
공항을 나오며 첫 숙소까지 가는 방법을 검색했었다. 숙소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두 번 타야 했다. 같은 번호의 버스가 여러 개 뜨고 비슷한 경로의 비슷한 번호의 버스들이 많아 헷갈렸지만 어쨌든 그중의 버스 하나가 도착하여 바로 탑승을 했다. 탑승한 버스는 빠른 속도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두 번째 정류장은 공항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버스를 탑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내려야 했는데 버스정보와 정류장 위치를 혼돈하여 엄한 곳에 내려 빗속에서 10여분을 걸었다. 정류장을 코 앞에 두고 하차 벨을 누른 나에게 버스 기사는 벨을 미리미리 누르라며 약간의 핀잔을 주었다.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버스정류장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나도 그 정도의 매너는 지키는 사람이다.
10여분을 걷는 동안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간이용에 가까운 3단 우산은 나와 배낭을 폭우로부터 지켜주기에 역부족이었다. 두 번째 버스가 정차하는 정류장에 다 도착했을 때에는 우산 밖으로 튀어나온 가방과 바지의 하단부가 축축할 정도로 젖어있었다. 양말과 신발은 거의 물속을 거쳐온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비를 부르는 남자라지만 이 정도로 거센 비와 함께 시작하는 여행은 또 처음인 듯하다. 온몸으로 비를 막은 우산을 접어서 땅에 세워두고는 스마트폰을 켜보니 제주의 날씨는 폭우 경보 상태였다. 그리고 오후 3시 23분이 되자 행정안전부에서는 비를 쫄딱 맞은 여행자에게 재난 문자를 보냈다.
[ 오늘 15시 15분 제주 호우 경보, 외출 자제 등 안전에 주의 바랍니다. ]
이 즈음되면 호우를 부르는 남자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 7
두 번째로 타야 할 버스는 해안도로를 따라 제주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202번 버스였다. 지도 어플은 서울과 달리 정확한 버스 위치를 제공하지 않았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에는 각 버스의 위치 별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표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버스가 정차하는 모든 정류장에 대한 시간표는 아니어서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몰랐다. 주요 지점 위주로만 도착시간이 나와 있어 내가 서있는 정류장에 관한 정보는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나와있는 모든 정류장의 이름을 훑어보며 내가 서 있는 정류장이 벽에 붙어있는 시간표에 나타나 있는 주요 정류장들 중 어디 사이에 있는지가 확인되자 대충의 도착시간을 유추해 볼 순 있었다. 못해도 20여분 안에는 버스가 도착할 것 같았다.
빗줄기는 계속 굵어져만 갔다. 마치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방공호에 혼자 갇혀있는 병사가 된 듯이 정류장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나마도 정류장이 지붕을 포함해 사방이 유리로 덮여있으니 망정이지 대충 벽만 세워진 곳이었다면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가 될 뻔했다.
예상처럼 202번 버스는 20분을 조금 넘어서 정류장에 도착했다. 빗줄기는 정류장을 나와 버스를 탑승하는 그 찰나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굵고 또 굵었다. 그 찰나를 통과하기 위해 땅에 세워둔 우산을 다시 펴서 쓰고 문이 열린 버스의 계단을 오르며 카드를 찍었다. 버스는 에어컨을 틀어두어 선선했다. 버스 복도에 발을 디디니 중간 즘에 위치한 두 좌석이 모두 비어있는 자리가 보여 성큼성큼 걸어가 배낭을 벗고 앉았다. 배낭은 창가 자리에, 그리고 나는 복도 자리를 차지했다. 동영상을 보고 어플로 버스 정보를 보는데 전력을 많이 썼는지 스마트폰 배터리가 꽤 닳아 있어 배낭에서 보조배터리와 충전 선을 꺼내 충전을 했다. 배낭을 벗어 놓고 눈으로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젖어있어 전날 짐을 챙길 때 배낭행 최종 탈락 판정을 받았던 수건 한 장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버스는 첫 번째 숙소가 있는 한림읍 용운동을 향해 나아갔다. 물론 그곳이 버스의 종점은 아니었다. 그 사이 관광객과 학생들이 버스를 타기도 하고 또 내리기도 했다. 오고 가는 승객들이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정비를 마친 뒤 블루투스 이어폰을 껴고 음악을 듣느라 그들이 발생시키는 소리까지는 듣지 못했다. 그 상태로 버스는 30여분을 계속 달렸고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인 용운동 정류장에 마침내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