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시 05분에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을 먹은 후 조금의 여유를 부리다 집을 나섰다. 배낭 오른쪽 측면의, 입구가 굉장히 짱짱한 고무줄로 돼 있는 메쉬 소재의 주머니에는 우산이 꼳혀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주도의 일주일간 날씨를 확인하였을 때 첫날에 비가 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첫날을 제외하고는 강수확률이 30퍼센트 선으로 낮았지만 대부분 흐린 날씨가 예보되고 있었다.
빌라의 현관을 나서자 이미 비가 오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3단 우산을 꺼내 쓰며 김포공항 가는 버스의 정류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사이에는 안경점에 들려 안경의 양쪽 렌즈를 갈았다. 바꾼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바닥에 떨어트려서 양쪽 렌즈 모두에 흠집이 나있었다. 렌즈 정중앙에 생긴 흠집이 마치 이물질이 묻은 것처럼 보여 시야의 집중력을 방해했다.
몇 달도 안돼서 다시 안경점을 방문한 게 조금 안타까워서였는지 똑같은 렌즈로 갈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장님은 지난번보다 5천 원이 저렴한 만 오천 원에 양쪽 렌즈를 갈아주었다. 그리고는 안경 닦개를 넉 장이나 건네주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접에 왠지 모르게 좋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도착하는 작은 행운으로 이어졌다.
매고 있던 배낭을 벗어 버스 뒷문 바로 뒤에 있는 좌석에 앉았다. 평일 오전의 시간이라 승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버스는 역 주변의 도심을 지나 교외로 돌입하며 점점 김포공항을 향해갔고 대한항공화물청사를 지나면서부터 비행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김포공항 국제선 정류장을 지나 국내선 게이트로 이동했다. 이제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던 찰나 버스는 정차하지 않고 국내선 게이트를 그대로 빠져나갔다.
#3
버스가 김포공항 국내선 정류장에 정차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누구도 하차벨을 누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김포공항인 버스였고 적은 인원이긴 해도 버스에는 나 말고도 대여섯 명의 승객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버스가 정차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벨을 눌러야 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물론 방심한 것은 스스로의 잘못이지만 그런 생각을 부추긴 데에는 나보다 늦게 버스에 탑승한 육군 병장의 존재도 한몫을 했다. 너무도 당연히 '저 친구 휴가 가려고 비행기 타는가 보고만'이라고 들었던 생각이 '이 버스는 당연히 공항 정류장에 정차할 것이다.'라는 얕은 믿음을 도출시킨 것이다. 하지만 버스는 어떤 거리낌도 없이 정류장을 지나쳐 버렸다.
" 여기,, 김포공항 아닌가요? "
적지 않게 당황한 나는 급히 배낭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금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기사에게 던졌다. 누가 봐도 공항인 곳에서 던진 어벙한 질문의 속 뜻은 사실 '여기 김포공항 맞는 것 같은데 버스를 왜 안 세워주죠?'에 가까웠지만 차가 서지 않는 당황스러운 마음과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는 나 이외의 승객들이 만들어내는 모종의 카르텔(?)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중이떠중이 같은 질문을 던져버린 것이다. 버스 기사는 살짝 기어들어가는 나의 말투를 이해하지 못해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고 그런 기사에게 나는 여기 세워주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그 물음을 물을 시점에 버스는 아직 김포공항 국내선 게이트를 완전히 지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기사는 단호하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며 요청을 거절했다. 기사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마음속에는 내심 서운한 마음이 생겼다. 그제야 하차 벨을 누른 나를 버스는 그다음 정류장에 토해주었다. 나는 버스가 잠시간 이동한 길을 거슬러 오르며 공항으로 걸어갔는데 빗 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 접었던 우산을 다시 폈다.
# 4
김포공항에 온 것이 언제였을까. 여행으로 온 것은 4년 전 제주여행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고 그 사이 출장 때문에는 한 번 온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인천공항이었다. 한 번의 유럽여행과 서너 번의 연변 출장은 모두 인천공항을 통해 오고 갔다.
배낭 말고는 짐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셀프체크인으로 티켓을 발권하고는 그대로 탑승구로 향했다. 티켓과 신분증을 확인하는 검색대 입구의 공항직원은 마스크를 잠시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일상의 흔적. 이어지는 검색대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기다림 없이 짐을 풀고 통과했다. 검색대에서는 큰 전자기기는 따로 빼 달라고 요청을 하기 때문에 빵빵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빼느라 조금 귀찮기는 했다.
검색대에 들어오기 전 발권한 티켓에는 탑승구 6, 탑승시간 13:05, 좌석번호 22C라는 정보가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검색을 위해 꺼내놓은 짐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배낭을 다시 짊어진 후 6번 탑승구로 가기 위해 코너를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좌측 편에 무빙워크가 보여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한 번의 무빙워크를 통과한 후에는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무빙워크에 의심 없이 올랐는데 아차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니 탑승구 6번이 이미 지난 상태였다. 첫 번째 무빙워크가 끝났을 때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무빙워크를 거슬러 올라갈 순 없기에 두 번째 무빙워크마저 억지로 통과하고 나서야 길을 돌아 6번 탑승구에 도착했다. 탑승구 앞에 비치되어있는 4열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으니 정면에 승객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여객기가 보였다.
# 5
탑승까지는 아직 30분 정도가 남은 시간이었다. 가져온 책을 읽을까 하다 가방에서 빼고 꺼내는 것에 귀찮음을 느껴 유튜브로 보던 영상을 마저 보았다. 삼국지 아저씨 임용한 역사학자가 들려주는 삼국지 콘텐츠를 버스에서도 보고 공항 식당가에서 돈가스 덮밥을 먹을 때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말년으로 더 잘 알려진 침착맨 채널에서 몇 달 전 처음 업로드하여 5부작으로 마무리한 '전혀 몰라도 입문할 수 있는 침착맨 삼국지'를 재밌게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유튜브 알고리즘이 삼국지 관련 콘텐츠들을 노출시키고 있었는데 해당 시리즈 영상은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의 열전을 정사 위주로 알려주는 콘텐츠였다. 7번째 업로드 영상이었던 백마장군 공손찬편을 거의다 보았을 때 즈음 탑승시간이 다 되어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공사 측에서는 탑승 안내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좌석 순서대로 탑승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좌석번호 20에서 30번 대 승객분들 먼저 앞쪽에서부터 줄을 서주시기 바랍니다. "
좌석번호 22C였던 나는 방송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줄을 서고 곧이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탑승구와 비행기를 잇는 탑승교를 통과한 뒤 마주하는 비행기 출입문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티켓을 한 번 더 확인했다.
C열은 복도 쪽 자리여서 머리 위 기내 수화물용 짐칸에 배낭을 올리고 바로 앉기에 편했다. 승객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가며 속속들이 앉기 시작했다. 탑승하는 승객과 그런 승객들의 짐을 올려주고 안내하는 승무원들 모두 누구 하나 빠짐없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가방 안에는 전날 챙겼던 일반 마스크 대여섯 장과 KF마스크 3장이 들어있었다. 자리에 앉은 다음에는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난 후 스마트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왠지 모르게 예전보다 남자 승무원이 더 많아 보였다.
안내방송 이후에 여객기는 곧 후진을 하며 활주로로 향했고 이윽고 출발하여 서서히 속력을 높여갔다. 점차 더 많은 양력을 받아가는 비행기는 살짝 점프를 하듯이 지면에서 떠오르며 공항을 벗어났다. 그리고 흐린 날씨에 조금은 어두컴컴한 하늘을 계속해서 올랐다. 그것이 육체적 피로 때문인지 정신적 피로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졸음에 나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코브 일당이 로버트 피셔의 생각을 훔치기 위해 LA행 비행기에서 단체로 잠에 들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