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여행 둘째 날에는 애월읍에 있는 새별오름에 가 볼 생각이었다. 꽤나 갑작스러운 여행이라 돌아다닐 곳을 미리 알아보지 못했었기에 전 날 저녁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 앉아 노트북을 켜 놓고는 이런저런 모자란 여행 계획을 채워 넣고 있었는데 그중 어떤 블로그를 통해 알 게 된 여행지였다. 숙박 예약 사이트에서 운영하는 듯한 그 블로그는 '제주 애월 가볼 만한 곳 10'이라는 제목으로 열 곳의 관광지를 소개하고 있었고 열 군데의 여행지 중 한 군데가 새별오름이었다. 들판 위를 가득 메우는 연 갈색의 갈대들이 인상 깊은 오름이었다.
숙소가 한림읍이긴 해도 애월읍 내륙에 있는 새별오름은 위치상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교통편을 알아보니 그 직선거리의 가까움은 전혀 이점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새별오름으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제주 국제공항으로 돌아가 거기서 새별오름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우니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여행자의 안일함이었다.
어플이 두 번째로 추천하는 경로는 제주공항으로 돌아가는 중간지점에 내려 다른 버스로 환승하는 경로였지만 그 대신 총 세 번의 버스를 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제주공항 쪽으로 다시 한 참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꽤 거북한 사안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내일의 여행지는 당장 확정해야 하는 시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고민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살짝은 당황스럽고 마음이 조급해지려 할 때 즈음 숙소에서 거리가 멀지 않은 섬 하나가 지도 어플에 보였는데, 제주 서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 비양도였다. 비양도에 가기로 했다.
#12
비양도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가까운 편에 속한 한림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배 시간을 알아보니 아침 아홉 시가 가장 빠른 배편이었고 그다음이 정오였다. 그리고는 2시간 간격으로 배가 있었다. 시간을 좀 꽉 차게 쓰고자 아침 아홉 시 배를 타고 들어가자는 다짐에 평소 출근용으로 설정되어있는 아침 알람을 그대로 둔 채 잠에 들었었다. 하지만 아침에 알람을 듣고 일어났을 때에는 마치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사람처럼, 눈은 떴으나 잠에서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그대로 눈을 감고 부족한 잠을 더 채우고 나서야 일어난 시간은 아침 여덟 시가 훨씬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배는 12시였기 때문에 갑작스레 아침은 생각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다. 느지막이 일어나 노트북을 켜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하고는 유튜브에 접속했다. 여유로움과 게으름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감성이 채우는 방안과 가장 어울릴 것 같은 노래는 Nujabes의 샘플링 원곡들이었다. 검색을 하자 유튜브는 누군가가 만들어 둔 여러 재생목록들을 화면에 선보였고 그중 가장 많은 곡을 담아둔 한 재생목록을 클릭하여 노래를 틀었다. 재생목록은 그 목차에 따라 노래들을 하나씩 들려주었고 그중 가장 감성을 채우는 두 곡, 'I Wouldn't Change A Thing'과 'Thank You Early Bird'를 반복해서 들었다.
귀와 마음을 음악에 열어둔 채 본격적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혼자 있는 덕에 할 수 있는 행동들, 노래를 틀어놓고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세수를 하고, 칫솔질을 하는 채로 방안을 돌아다니는 자유로움이 나를 충만하게 했다. 늦장을 부려도 12시까지 한림항에 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준비 시간을 즐겼다.
흰색 면티를 입고, 그 위에 베이지 색 쿨에어 티셔츠를 겹쳐 입은 뒤 바지로는 어제 입은 검은색 조거 팬츠를 입었다. 처음에는 흰색 배경의 검은색 가로 줄무늬 티 위에 연변에서 100위안을 주고 구매한 나일론 소재의 검은색 7부 셔츠를 걸치려 했지만 날씨가 27도 이상으로 더울 예정이라 다음으로 미뤘다. 옷을 다 입은 후에는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여자친구가 사줬던 선크림을 얼굴과 팔에 골고루 펴 바른 후 당일에 필요한 짐들을 배낭에 넣었다. 여행 짐을 다 들어내고 당일에 필요한 짐만을 넣은 배낭은 하루를 여행하기에 적합할 정도로 꽤 가벼운 느낌이었다.
#13
한림항 까지는 첫날 탔던 202번 버스를 타고 가도 됐다. 하지만 걸어서도 가볼만한 거리여서 그냥 걸어가 보기로 했다. 영화배우 하정우만큼 걷기 마니아는 아니지만, 나도 걷는 것의 의미와 매력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다. 걸으면 마치 멈췄던 혈액순환이 다시 시작되는 것과 같이 구름처럼 뿌였던 머릿속에 생각의 줄기가 이어지고는 한다. 신체가 반복되는 행동에 기분 좋게 사로 잡히면 생각은 자유로워지고 영혼은 맑아진다. 그것이 걷는 것의 활력이다. 30도 가까이 올라간 기온과 습하디 습한 날씨에 출발하자마자 등줄기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지만 그게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며 기초대사량이 떨어져서인지 요새는 운동을 해도 예전처럼 땀이 잘 나질 않는다.
40여분을 걸으니 본격적으로 해안가에 정박해있는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착장 앞바다를 넘어 그 뒤로 비양도가 보였다. 어플을 다시 한번 보니 10분을 더 걸으면 한림항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상태로 5분여를 더 걸었을 때 즈음이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비양도 가는 배 타는 법'을 검색하니 비양도를 가는 선착장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곳은 지도 어플에서 '한림항'으로 검색되는 곳이 아닌 '한림항 도선 대합실'이었다. 처음으로 비양도가 보였던, 배들이 많이 정박해있던 바로 그곳 근처였다. 황당한 마음으로 다시 뒤를 돌아 걷기 시작하자 등줄기에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는데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서서히 불쾌지수가 오르고 있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거슬러 5분여를 가니 처음 비양도가 보였던 지점에 다시 도착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조금 더 걸으니 한림항 도선 대합실이 보였다. 대합실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10분경. 파출소 비슷한 느낌의 도선 대합실로 들어가니 정면에 티켓팅 창구가 보였다. 다행히 대합실 안은 에어컨 덕에 시원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대로 창구 쪽으로 다가가 직원에게 비양도에 들어가는 왕복표 하나를 달라고 말했다.
"뒤에서 승선신고서 작성해 오시구요. 12시 배 맞으시죠? 11시 20분 배는 옆 창구에서 사셔야 해요."
11시 20분 배라고? 알고 보니 비양도로 가는 배는 두 가지였다. 천년호와 비양도호. 이에 따라 각각 서로 다른 왕복 스케줄과 서로 다른 매표창구가 있었던 것이다.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 서류를 작성하는, 등이 적당히 굽어진 어정쩡한 자세로, 창구 직원이 '뒤'라고 가리킨 테이블에서 승선신고서를 작성하던 나는 순간 11시 20분 배를 탈까 고민했지만 그냥 계획대로 12시 배를 타기로 했다. 중간에 돌아온 길을 포함하여 대합실까지 오는데 꽤 많이 걸어 땀이 비 오듯 했고 습한 날씨에 그대로 배를 탈 생각을 하니 조금의 불쾌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젯밤 생각했던 것처럼 시간을 좀 알차게 쓰려면 20분 차를 타는 게 맞았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처럼 그 순간에는 숨을 좀 고르고 싶었다. 또 화장실에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계획했던 대로 12시에 출발하는 천년호 티켓을 끊고는 대합실 밖으로 나왔다. 나와서는 입구에서 몇 발짝을 걸어 건물 전체가 나오게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가로로 들고 카메라 어플을 켜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대합실을 나와 반대편 선착장을 향해 걸어가는 한 아저씨가 툭 던지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 11시 20분 배 타지 왜 12시 배를 타? "
나는 갑작스러운 낯선 이의 질문에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얼버무리는 대답을 했다. 한데 애초에 멈출 생각이 없는 아저씨의 걸음걸이는 답변을 귀담아들을 생각이 별로 없는 듯했다. 답변을 들을 생각이 없는 질문은 그게 과연 질문인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아저씨는 선착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선택이 받은 급작스럽고 퉁명스러운 질문은 그 의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속에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질문이었다.
12시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아 나는 대합실로 오던 길에 보였던 한 카페로 걸어갔다.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달달한 것이 당겨서 시원한 연유 카페라떼를 하나 시키고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는 대합실만큼이나 시원했다. 곧이어 나온 연유라떼도 달콤하니 맛이 참 좋았다. 음료를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오니 습기와 열기에 지쳤던 심신에 다시 기운이 돌고 호흡은 점점 차분해져 갔다. 하지만 아저씨가 불현듯 뱉은 참견은 계속 머리와 가슴속에 맴돌았다. 흥건하게 땀에 젖은 안쪽 흰 티를 뒤로 젖힌 후 손 선풍기를 3단으로 틀어 말려보려 했지만 땀을 제법 많이 머금은 티는 생각보다 쉽게 마르지 않았다.
# 14
카페에서 땀을 식히던 때를 기준으로 2시간 즈음 뒤인 1시 반, 나는 비양도의 비양봉 정상 등대에 올랐다. 배를 타고 도착해 섬을 뱅 둘러 걷다가 어느 지점부터 시작된 오름을 몇십 분 정도 오른 뒤였다. 간혹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작은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은 한적함이 대체로 유지되는 시간이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 중 풍경이 멋진 곳에서는 사진도 제법 찍었다. 풍경을 찍기도 했고 카메라를 계단 같은 곳에 세워두고는 갤럭시 노트의 펜을 이용해 셀카를 찍기도 했다. 오름의 정상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멀리 서는 제주 본섬의 해안가가 눈 앞에 펼쳐져 보였다.
오름 정상에 오르며 갤럭시 노트의 팬으로 셀카를 찍는 맛을 알아차린 나는 정상에서도 등대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오름의 중간들과는 다르게 정상에는 스마트폰을 세울 수 있는 적당한 무엇이 없었다. 바닥에서 아주 조금 솟아있는, 관공서에서 만들어둔 듯한 사각의 셀카 존에 어떻게든 스마트폰을 세워보려 했지만 바닥의 풀들이 렌즈를 가려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오지가 않았다.
방법이 없어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엎어 두고는 그 위에 스마트폰을 어떻게든 세워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등대로 올라왔던 방향의 반대 방향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 한 쌍. 그들이 올라온 길은 잘 정비된 내가 올라온 길과는 다르게 발목까지 오는 수풀이 무성했다. 그 무성한 수풀 사이로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이라 보기는 어려운 발바닥 폭 정도 되는 흙길이 보였다. 오르느라 꽤나 숨이 찼는지 남편은 정상에 오르자마자 등대 옆 바닥에 엉덩이를 철퍼덕 깔고 앉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힘드네"
갑작스레 등장한 두 사람 덕에 인기척이라곤 없던 등대 주변에 사람의 기운이 돌았다. 바닥에 가방까지 내려두며 셀카를 찍으려던 나는 예상되는 민망함에 부부가 보기 전 다시 가방을 들쳐맸다. 그리고는 태연한 척 주변을 바라봤다. 바라보며 이미 찍은 제주도 본 섬의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말들이 떠올랐다.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하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그 말을 실제로 뱉지는 않았다. 뭐랄까, 자연 속에 오롯이 혼자 존재하는 듯한 자유로움 속에서 갑작스레 사회인이 되는 자신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시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45분여 남은 시점에서 나는 조금 서둘러서 오름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름을 한참 내려오다 보니 갈림길 비슷한 길이 나왔다. 갈림길이라고 하기엔 한쪽은 내려오던 길처럼 나무데크로 된 정돈된 계단이었고 한쪽은 야생 그대로의 길이었다. 분명 올라올 때도 마주친 길이었지만 그때는 정돈된 길 만 따라가느라 눈에 띄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야생의 저 길은 뭘까 하고 몸을 그쪽으로 기울이던 찰나,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그쪽으로 가면 다시 올라가요. "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소리를 낸 사람은 정상에서 마주친 부부였다. 그 둘도 내가 정상을 내려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름을 내려왔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부부는 그 야생의 길로 정상에 올랐던 것 같았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던 남편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본인들이 사서 한 고생을 누군가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를 불러 세웠던 것. 그렇게 생각하니 정상에서 사진이라도 찍어 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꺼내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마음이 왠지 모르게 민망하게 느껴졌다.
남편 분의 작은 외침은 여행의 두 번째 날 마주친 낯선 사람의 두 번째 참견이었다. 하지만 한림항 도선 대합실 앞에서 들었던 아저씨의 참견과는 다르게 그 참견은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대답이 따로 필요 없는, 정보를 전달하는 참견은, 대답을 요구하는 형태를 띠면서도, 대답을 원하지 않는 참견과 참 상반되는 감정상태를 만들었다. 두 번째로 맞닥뜨린 갑작스러운 여행의 참견에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평범한 말을 남겼다. 첫 번째 참견에 대해 얼버무리는 답변을 한 것과는 다르게 "고맙습니다."라고 내뱉은 말은 그것보다 꽤 정확하고 선명했다.
오름을 완전히 내려오고 난 후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마을로 돌입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던 두 사람은 서서히 시야 밖으로 사라져 갔다. 비양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었기에 다시 배를 타고 섬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그 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 나도 천천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