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이야기 한 사실이지만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시간의 개념을 확장하고 비틀어버리는 그의 이야기들은 낯선만큼 어렵지만 그만큼 신선하다. 근래에는 시간 역행의 소재를 다룬 테넷을 봤다. 등장인물들은 영화 내에서 회전문이라는 장치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런 상태를 영화에서는 인버전 상태라고 한다. 회전문에 들어간 사람은 그 순간부터 거꾸로 재생되는 듯한 세상 속에 있게 된다. 재밌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동시간 대에 똑같은 사람이 두 명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 동안 내 일상을 촬영한 비디오를 저녁에 거꾸로 재생하여 본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나는 화면 속에도 존재하고 화면 밖에도 존재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화면 속 세상과 나는 명확히 구분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없지만 테넷에서는 시간을 역행하는 존재는 자신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뿐 여전히 같은 세상에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식투자가 열풍인 시대에 살고 있다. 6월 28일 기준으로 대한민국에 활동 중인 주식계좌만 약 4800만 개, 예탁금은 68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계좌수는 중복 가입자가 많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수치다. 쇼핑 사이트에 가입하면 쿠폰을 주듯 주식 계좌를 개설하면 주식을 1주 무료로 주기도 한다. 미디어에서는 너도나도 주식 투자 관련 콘텐츠들을 만들어 내보내고 있다. M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 스타는 기존에도 비연예인인 인물들이 종종 출연했었는데 근래에는 유튜브에서 주식/투자 콘텐츠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경제인들이 종종 출연하고 있다. 복제하듯 만들어지고 있는 관찰 예능에서도 연예인들이 모바일로 주식 투자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즘 되면 온 국민 주식투자의 필요성을 천명하던 메리츠자산운용 존리 대표의 주식투자 운동이 성과를 거두는 듯하다. 그는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정말이지 일관성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항상 똑같은 말을 하곤 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여윳돈으로 투자해라, 주식은 노후준비다. 빛내서 투자하지 마라. 가격을 예측하려고 하지 마라 등등 투자에 있어서의 원론적인 이야기들이다. 모든 매체와 콘텐츠에서 그 말을 반복적으로 접할수록 이 분이 얼마큼의 진심으로 주식투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지가 화면 너머로 느껴지고는 한다.
카카오TV에서 볼 수 있는 웹 예능 중에는 '개미는 오늘도 뚠둔'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연예인들과 경제인들이 같이 출연하여 실전 투자를 함께 해보고 투자의견을 수집하기 위해 기업을 탐방해보는 등 주식투자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 모습이란 마치 그동안 경제인들이 투자로 성공하기까지 걸어왔던 길을 답습해 보는 듯하다. 출연진으로는 노홍철 장동민 딘딘 등의 연예인과 함께 슈카, 김동환(김프로) 등 경제인들이 있다. 이 중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의 김프로로 더 잘 알려진 김동환 투자자는 얼마 전 앞서 언급한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적도 있다.
당시 방송에서 김동환 투자자는 한 유행어를 소개했다. 홍반꿀이라는 줄임말이었다. 그 뜻인즉슨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방송인 노홍철이 특정 주식을 사기만 하면 그 값이 떨어져 '홍철이 반대로 하면 꿀'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 그대로 노홍철은 방송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치 주식의 신이 내가 어떤 주식을 매매하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해당 방송을 캡처한 장면은 인스타그램 세상에 밈처럼 저장되어 피드를 돌리다 보면 한 번 즘 볼 수 있는 콘텐츠가 되기도 하였다.
노홍철의 투자 실패는 메리츠자산운용 존리 대표의 주문과도 같은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가격을 보고 사지 마라. 주식을 사자마자 가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가격이 많이 올라간 주식을 샀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매수를 했는데도 가격이 더 올라가면 좋은 일이겠지만 사는 것마다 족족 가격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값이 오를 때로 오른 주식만 골라 담아 샀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급등한 주식을 소문으로 듣고 매수를 했다면 설명이 가능한 대목이다. 잘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오른 주식은 금세 그 가치를 재평가받아 하락하기 마련인데 만약 이런 과정을 반복한 것이라면 노홍철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주식의 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누군가 자신의 주식계좌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주식의 신이 된다면 마치 미래에서 일주일 뒤의 로또 번호를 알아오는 것처럼 황홀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3일 뒤 급등할 주식을 이미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할 일이란 전 재산을 투자하고 가만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만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꿈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시선을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리면 누구나 주식의 신이 될 수 있다. 차트라고 하는 이미 일어난 결괏값을 보면 매분 매 초마다 정확히 주식 가격이 얼마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산 정상에서 능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 저기쯤에서 경사가 너무 심해 올라오는 게 힘들었었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과거를 바라보면 언제 주식을 샀어야 하는지가명확해진다. '''~라고 할 때 살걸'이라고 할 때 살걸'이라고 할 때 살걸'이라는 웃픈 유행어는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결심이 필요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투자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는 말이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과거란 이미 고정되어 변화시킬 수 없는 시간 때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누구나 백전백승의 주식투자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쉬워 보인다. 마치 로또 번호를 들고 일주일 전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여행자처럼 급등한 주식의 몇 달치 차트를 들고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할 일이란 상승하기 전에 주식을 매수하고 상승한 후 주식을 매도하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동냥으로 얻어낸 이런저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판단해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간을 되돌아가 미래의 차트를 보고 투자를 한다는 그 대목에 시간에 대한 과학적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점에서 들고 온 한 기업의 주가 차트라는 것은 내가 그 기업에 투자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다. 정답지를 미리 입수한 수험생처럼 그 차트를 보고 저점마다 투자를 하면 그 이후의 세상에서도 그 차트처럼 동일한 형태로 주가가 형성될까? 물론 주식을 딱 한 주만 매수한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매수의 금액이 천만 원 이천만 원 또는 억 또는 몇십억이라면? 매매에 10억 원이 참여한 차트와 그렇지 않은 차트가 과연 똑같은 등락의 흐름을 보일 수 있을까? 또는 과거로 갈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 나 말고 수백 명이라면 어떨까? 엊그제 급등한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너도 나도 테넷의 회전문을 통과하면 그 과거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래도 주가의 흐름이 한 번 진행된 흐름과 똑같이 진행될 수 있을까? 이건 마치 며칠 전 이야기한 양자역학의 세상과도 같다. 전자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행위가 전자에 너무 큰 힘을 가하여 결국 운동량을 아는 순간 전자의 위치까지 아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그 금액이 크면 클수록 매수를 하는 행위 자체가 시장에 영향을 주어 행위를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역시 주식투자로 유명한 한 경제인은 투자할 금액 대비 시가 총액이 작은 종목을 거래할 때는 분할하여 매수/매도한다고 한 적이 있다. 행위 자체가 시장을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단일 존재의 물리량을 측정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개체의 전반적인 현황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통계물리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많은 사람과 자본이 오고 가는 주식시장이란 어쩌면 양자역학적 성질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영화 테넷에는 할아버지의 역설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과거로 돌아가 나의 할아버지를 죽이면 그 후손인 나는 과연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관한 것인데. 역설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에서는 그런 상황은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이면 내가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어지니 할아버지를 죽인 나 역시 존재할 수 없게 되어 역설적으로 할아버지를 죽일 수 없다는 내용이다. 마치 수학에서 복소수를 처음 다룰 때처럼 이상하고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이야기지만 결론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그런 사건은 발생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누군가 회전문을 통과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발생시키는 일은 시간을 순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겹치는 시간 대에서 이미 발생한 일이 된다.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가 만들어낸 결과까지 포함하여 시간의 역사가 쌓인다는 말이다. 결국 내가 존재하는 한 과거로 돌아가 나의 존재에 영향을 주는 할아버지를 죽이는 일은 발생시킬 수 없다는것이 영화의 설명이다.
영화 속에서는 할아버지의 역설에 대해 대충 그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시간 이론이 있으니 바로 평행우주 이론이다. 평행우주 이론이란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로 유명한 이론인데 말하자면 특정 결정의 순간순간마다 해당 결정을 했을 때의 우주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우주가 갈라져 동시에 여러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내가 오늘 밤 썩은 사과를 먹어 배탈이 났다면 사과를 먹지 않아 배탈이 나지 않은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이론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순간 할아버지가 죽지 않은 우주와 할아버지가 죽은 우주가 나뉘게 되어 미래의 손자가 할아버지를 죽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할아버지가 살아있는 우주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할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결과를 얻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조금 다르다.
다시 주식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결국 이렇게 결론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차트를 들고 과거로 돌아가 급등하기 직전 전재산을 걸어 매수의 버튼을 누르면, 그 순간 우주는 두 갈래로 갈라지고 나는 가져온 차트와 전혀 다른 주가의 흐름을 보이는 우주에 속해져 쪽박을 찰 수 도 있다는 사실. 대출까지 동원했다면 쪽박에 더해 패가망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을 하면 패가망신을 한다는 선대의 가르침은 평행우주의 이론까지 몸소 입증을 해둔 과학적으로 뿌리 깊은 이야기였던 것일까. 주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며 차트를 분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일침 하는 존리 대표의 말은 평행우주라는 초 고도의 과학이론까지 고려한 철옹성 같은 주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분의 말에서 그런 강력함이 느껴졌던 것인지. 심지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주가의 차트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혹시 평행우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차트란 테넷의 설정처럼 미래의 내가 인버전 되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투자를 한 것까지를 포함한 결과물일 테니 시간여행을 할지라도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도 매수를 하지 않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테넷 -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
투자를 시작한 지는 2년 정도가 된 것 같다. 사실 주식투자를 하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불과하고 펀드 투자를 열심히 하고 있다. 몇 십억이 넘는 거대 아파트들 사이에서 귀여운 월급을 받는 소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재테크를 안 하고서는 평범한 미래를 맞이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투자에 대한 책과 유튜브를 많이 보고 있지만 아는 것만큼이나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투자의 세상인 것 같다.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또 반대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를 할 수 도 있는 일이 요즘 돌아가는 세상인 것. 결국은 나 자신과 내 인생의 흐름을 정확히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미디어에 보이는 누군가의 성취를 내 것으로 만드려고 하기보다는 내 인생의 맥시멈을 만들려고 하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다른 평행우주 속 나의 인생도 똑같은 존재가 만들어낸 결과이지만 지금 이쪽 우주의 내 인생에서는 그것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평행우주 속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과거로 올라가도 주식 대박을 칠 수 없다면 좋은 투자를 하는 방법이 하나 남아 있기는 하다. 인생 자체가 시간 역행인 테넷의 닐이 될 것이 아니라 크리스토퍼 놀란의 또 다른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가 되는 법이다.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10분마다 기억이 사라지는 레너드는 좋은 주식을 사서 수면제를 먹으라는 투자계의 뼈 있는 농담을 완벽하게 실행시킬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단 한명의 남자다. 특정 시점 이후로는 기억이 쌓이지 않는 레너드에게 현실이란 언제나 중간 과정을 생략한 미래로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전망이 밝은 우량주에 집중투자를 하고 허벅지에 2040년에 주식계좌를 열어보라 라는타투를 새기면 부자가 되는 일은 이제 따 놓은 당상이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또다시 평행우주가 갈라져 30년 후 대박을 친 나는 다른 평행우주에 있으며 나는 계좌가 1/200 토막이 된 세상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하기 바란다. 증권사는 입버릇 처럼 원금 손실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투자자에게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