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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것들 투성이

[2일 차] 레온 - 체크 인 레온

by 글객
투성이 : 접사 '그것이 너무 많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물, 사람'


나의 순례길 여정은 레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러 순례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다는 프랑스길, 장장 800km가 넘는 그 길의 중간에 레온이 있다. 레온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는 320km로 전체 구간의 40% 정도로 볼 수 있다.


파리를 경유하여 마드리드로 도착하는 항공편, 그리고 우리나라로 치면 KTX 즘 되는 기차인 RENFE - AVE를 타고 2시간을 더 이동하여 레온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은 아침 아홉 시. 도시는 청초하고 한산했다. 건물 하나하나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을 것 같은 유럽 도시의 거리를 걷는 건 역시나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이윽고 낯섦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도시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호흡하며 한 동안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그 입장이 변화하자 도시는 단숨에 낯선 것들의 투성이가 되었다. 그건 스스로에 대한 재확인의 과정이었다. 그렇다. 나는 낯선 곳을 두려워한다. 아니 정확히는 낯선 사람을 어려워한다.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이 낯선 곳에 도대체 왜 왔는지라는 질문으로 전환된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완벽한 이방인의 마음이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몹시도 불편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와 그나마 알아듣지만 금세 한계에 봉착하는 영어. 고민 끝에 정한 알베르게 사장님의 영어는 억양 때문인지 속도 문제인지 나의 빈약한 듣기 실력 때문인지 반도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처음엔 한산했지만 점차 사람들로 채워지는 도미토리. 그럴수록 작아지는 마음. 크고 작은 움직임을 가져갈 때마다 주변이 신경 쓰여서 좀처럼 그 공간이 편해지지 않았다.


알베르게에 들어가기 전 아직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용기 내어 들어갔던 식당에서는 짧은 영어 소통도 되질 않았다. 손짓 발짓으로 뉘앙스를 교환하며 내린 결론은 아직 음식이 준비되지 않았다 정도였다.


사람이 복작거리는 다른 식당은 도무지 혼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굶주림을 조금 더 참고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서 바로 근처의 KFC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익숙한 것에 기대기로 했다. 매장에 있는 키오스크가 반가웠다. 스페인의 식당들은 대부분 오전에 영업을 하지 않아서 프랜차이즈 식당들도 정오가 지나서야 이용할 수 있었다.


알베르게에 마련되어 있는 손빨래장에서 빨래를 마치고 나서야 몸을 뉘었다. 전날 비행기의 도착 시간은 밤 11시 그리고 마드리드의 차마르틴 역을 떠나는 기차는 7시였다. 시간의 애매함과 그에 따르는 숙박의 번거로움에 전날은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제대로 된 잠자리에 몸을 뉘인 게 이틀은 되었을까. 시차와 수면 부족이 합쳐져 정신이 몽롱했다.


다음날 새벽같이 출발하려면 레온 시내를 탐방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지친 몸을 일으켜 시내를 둘러볼 생각도 했지만 이내 접었다. 그 마저 욕심이다. 어느 순간에도 최우선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챙기는 것 아닌가. 기회가 돼도 인연이 아닌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인연이 아닌 도시도 있는 것이겠지.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무엇보다 충분한 휴식 그 자체이다.


알베르게 '체크 인 레온'에는 침대 양옆에 커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 자리에는 오른쪽만 커튼이 있었지만 왼쪽 침대의 커튼이 닫혀 있어 대보분의 시야는 차단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순례자들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자신의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 느낌은 마치 야전 캠프와 같았고 나는 스페인 부대에 발령을 받은 용병이 된 듯했다.


도미토리 이곳저곳에서 알 수 없는 스페인어 난무했다.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린다는 사면초가의 마음은 이런 마음이었을까. 하지만 전날 공항바닥에 비하면 천국과도 같은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 매트리스와 나의 시야를 차단해 주는 커튼의 존재는 엄청난 안락을 제공했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관찰자가 되었다. 관찰자가 되어 나와 상관없는 목소리들이 되니 난무하던 스페인어들은 운율 있는 멜로디처럼 들려왔다. 아직 여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꿀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숙면과는 도통 인연이 없는 내가 정말 오랜만에 만끽한 깊고도 충분한 수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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