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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 May 26. 2024

정해져 있는 모든 미래가 갑갑해졌다.

[4일 차] 비야르 데 마사리페 -> 아스토르가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느꼈던 점 하나는 4주간의 긴 여행 기간에 필요한 모든 제반사항을 여행 전 미리 준비하고 결정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건 이미 나의 24시간과 일주일은 적절히 구분되어 일상을 기꺼이 살아가는 데에 모두 할당되어 있기 때문이 첫 번째 이유였고 긴 여행기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들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확정하고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래서 초반과 중반의 숙박이나 최소한의 교통편을 예매하고 기본적인 경로 설정을 한 것 말고는 나머지를 모두 현장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순례길 트래킹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보고 적절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부족을 느끼고는 했다. 순례길을 간다고 누군가 빨래와 청소를 대신해주지 않을뿐더러 하던 운동을 순례길을 핑계로 중단하는 것도 무엇인가 본질에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준비되지 못한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하면서 (준비를) 하자는 마음으로 공항길에 오르고 비행기를 탔다.


많은 것들이 정해져 있지 않은 내일이란 불안함을 만들긴 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이어가게 만드는 어떤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했던 것은 정해져 있지 않은 내일이란 반대로 모든 가능성들이 현재에 흡수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해서 그때 그때의 순간에 더 충실하고 더 최적화되어있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상투적인 말처럼 정말이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안전한 삶이란 언제나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일까. 때로는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침몰하는 여객선에선 현재를 뒤로하고 위험이 도사리는 밖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 무엇보다 현명한 행동이 된다. 내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정해져 있는 내일 속에 계속된 기회와 안전망이 존재할 때에만 가치가 유지되고 정해져 있는 내일이라는 울타리 안에 더 이상 다양한 가능성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울타리 밖의 다양한 가능성 속으로 뛰쳐나가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지 모른다.


순례길 위에서, 정해져 있는 나의 모든 미래가 갑자기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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