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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 May 28. 2024

사람을 홀리는 마을

[5일 차] 라바날 델 까미노 -> 폰세바돈

아스토르가를 떠난 후 다음 도착지는 폰세바돈이라는 곳이었다. 여행을 준비할 때 무엇인가 의지할만한 공인된 정보가 필요했었는데 조대현이라는 작가분의 '처음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가이드북'이 그 이정표가 되었다. 순례길 시작점을 레온으로 잡은 것도 추천 단축코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고 어떤 물품이 필요한지 배낭은 어떤 사이즈가 적합한지 기차는 어디서 타야하는지 등 준비과정에서 많은 정보들을 이 책에서 얻었다. 폰세바돈이라는 도착지가 정해져있는 것도 일단은 모든 경로를 이 책의 추천대로 설정했기 때문이었다.


순례길에는 순례자들이 머물 수 있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수 많이 존재한다. 어떤 곳은 도시라 부르는 것이 적합하고 어떤 곳은 마을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폰세바돈이라는 곳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게 거의 없었지만 책에서 설정한 경로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고려하여 전체 일정을 적절히 분배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큰 의심없이 이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폰세바돈이라는 동네에 도착하기 직전 등장한 한 마을은 묘하게 나를 홀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언덕 위에 존재하는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라는 마을이었는데 지나가는 여행객의 발목을 잡아끄는 듯한 매력이 풍기는 곳이었다. 사실 이번 순례길을 걸으며 내 발걸음이 평균이상으로 빠르다는 것을 많은 다른 순례자들을 지나치면서 새삼 알게 됐었는데 그 빠른 발걸음으로 이동을 하니 생각보다 일찍 폰세바돈이라는 목적지 근처까지 올 수 있었고 그렇게 시간적 여유까지 생긴 나머지 숨이나 고르고 가자는 생각에 이 마을의 한 벤치에 앉아 주변을 감상하였다.



처음에는 정말이지 쉬어가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이내 바뀌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 매력적인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 고요하고 운치있고 심지어 판타지적인 냄새까지 풍기는 마을의 한 곳을 차지하고 앉으면 글쓰기와 관련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황홀함을 맛보고 싶다. 폰세바돈이라는 동네까지 오늘가지 않으면 그 만큼 내일의 여정이 더 길어지겠지만 글로벌 평균보다 빠른 나의 이 발걸음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결국 굳어졌고 자연스레 스마트폰을 들어 이 동네에서 숙박할 수 있는 알베르게를 찾기 시작했다.


알베르게를 찾다보니 더욱 놀라운 사실도 하나 발견하였다.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할 것만 같은 한 알베르게에서 무려 라면과 김치 공기밥을 식사로 팔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 알베르게는 이런 이유로 한국인들에게 제법 유명한 알베르게로 되어있는 것 같았다.


단 번에 그 알베르게로 갈 수도 있었지만 꽤나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른 알베르게도 서칭을 해보았다. 시간이 많이 남으니 천천히 여유롭게 리뷰나 평점도 참고하면서 어떤 알베르게로 가야할지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인상이 강렬했던 그 라면을 파는 알베르게는 계속해서 마음 속에서 신호를 보냈고 결국 이 알베르게에서 숙박을 하기 위해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 알베르게가 굉장히 유명해서였는지 이미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는 것이었다. 음식을 판매하는 공간인 듯 한 알베르게의 마당은 장사가 가장 잘되는 시간의 음식점 마냥 시끌벅쩍한 상태였고 침대 배정 순번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배낭도 제법 많이 쌓여있었다.


아, 그 공간을 잠깐 동안 둘러본 후에 나는 본능적으로 다시 그 곳을 빠져나왔다. 많은 인파가 몰려있을 때 발산되는 특유의 부산스러움은 나에게 반가운 신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라면과 공기밥과 김치가 아무리 맛있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못한 공간에서 하루를 머물 다 갈 수는 없었다.


발길을 돌려 다른 알베르게로 향했다. 조금 전 구글 맵을 찾아볼 때 눈여겨 보았던 또 다른 알베르게였는데 마을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기껏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야했다. 정방향으로 순례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거슬러 내려가 알베르게의 문을 열어 숙박이 가능 하냐고 묻자 직원은 명료하게 한 마디를 내 던졌다.


"It's full"


아뿔싸. 비교적 남들보다 빠르게 이 마을에 도착해서 여유를 부린 탓인지 아니면 예약을 딱히 하지 않고 숙소를 찾아다닌 만용때문이었는지 알베르게는 이미 자리가 모두 꽉 차 있었다. 일반 숙소들이 몇군데 있었지만 알베르게에 비해서는 요금이 훨씬 비쌌고 영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고 하는 공립처럼 보이는 알베르게는 왜인지 선뜻 끌리지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벌써 한 시간 이상이 흘렀다. 이즘 되면 갑자기 계획을 바꿔 이 마을에 머물려고 했던 그 판단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미련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원 계획으로 선회하여 폰세바돈으로 향하는 순례길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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