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신과 시차의 방]
티켓팅과 수하물 신고, 그리고 유심 수령까지 검색대를 제외한 신경 쓰이는 절차를 모두 다 밟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몸은 아직 조금 무거웠다. 여행을 출발하는 날이 4박 5일간의 제주도 워크숍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그것도 아침 10시 어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여행을 준비하기란 썩 쉽지 않았다. 틈나는 시간마다 물품을 구매하고 알아볼 것들을 알아봤지만 출발하기 전날 밤까지도 아직 준비하지 못한 게 남아있었다. 그중 몇몇은 내적 타협과 심리적 손절매의 과정을 통해 포기해야만 했다. 예컨대 오프라인 구글 지도를 다운로드하는 일을 끝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별 것 아닌 일들 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짓수가 많아지다 보니까 순간순간의 판단으로 우선순위가 밀리는 일들이 막판까지 남아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일반적인 여행이었다면 훨씬 덜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게 자전거 여행인지라 상대적으로 구매해야 할 것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더군다나 자전거를 원래부터 타던 사람이 여행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자전거 여행을 가기 위해 한 달 전 즈음에야 처음 자전거를 구매한 사람이었니,, 자전거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사실 외에는 다 처음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친구와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맘먹은 이후 한 달 동안 주말마다 자전거를 80km씩 탔다. 19일이나 지속되는 장거리 자전거 여행이었던만큼 그에 걸맞는 적응력을 길러야 했기 때문이다. 주중 저녁에는 구매할 품목들을 인터넷에서 주문하거나 근처 마트, 다이소를 방문하여 사야 했다. 이를테면 전조등이랄지, 스마트폰 거치대, 백미러, 그물망, 고글, 자물쇠, 복대, 만능 어뎁터, 우의 등 자전과 관련 용품 및 여행 관련 자질 구래 한 물품들이었다. 유럽에 먼저 가있던 친구와 여행 계획을 짜면서 기본적이고 큼지막한 준비물들은 이미 함께 구매해둔 상태였지만(침낭, 텐트, 의류, 휴대용 펌프, 패니어 백(자전거용 짐가방), 리어 렉(자전거 짐받이) 등등) 그 이외에 개인적으로 챙겨할 것들과 사야 할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가기 전에 자전거 수리, 자전거 분해 결합 연습 등 단순히 구매하고 챙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습득해야 하는 일들도 꽤 있었다.
출발 날짜를 워크숍 바로 다음날로 잡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느 항공사던 자전거를 위탁수하물로 보낼 순 있었지만 추가 비용 없이 보낼 수 있는 항공사는 몇 개 되지 않았었다. 그중에서도 대만의 에바항공, 영국의 영국항공과 친구가 이용한 러시아의 한 항공사 등만이 지정된 포장규격과 무게 제한 아래 무료로 자전거를 실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항공사가 제한적이니 출발 날짜를 결정하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여행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워크숍 다음날이 아니고서야 딱 맞는 항공편을 찾기가 어려웠다.
전날 제주도 워크숍에서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거진 오후 세시 반이었다. 당장에 해야 했던 일은 자전거를 분해해서 자전거 박스에 넣고 포장하는 일이었다. 자전거뿐만이 아니라 23kg의 위탁수하물 제한 규정 아래로 침낭과 텐트, 매트 따위를 함께 넣어야 했다. 이외에 물품들은 한 달 동안 틈날 때마다 방바닥에 카테고리별로 나눠 쌓아두었기 때문에 가방에 챙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자전거 박스는 이미 구해둔 상태였다. 그 전 주에 형 차를 빌려다가 동네에서 갈 수 있는 웬만한 자전거 가게를 다 뒤졌었다. 결국 자전거 박스를 주겠다는 가게 하나를 찾았지만 당장은 가지고 있는 박스가 없다며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웬만하면 내가 다시 가지러 가고 싶었지만 결국은 그 뒤로 영 짬이 안나 부모님이 대신 그 가게에서 자전거 박스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실제로 자전거를 넣어보려고 하니 이게 말썽이었다. 사이즈를 보려고 분해가 덜 된 자전거를 잠깐 넣어보니까 바퀴는 박스 위로 튀어나오고 양 옆으로도 공간이 턱 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자전거 박스가 어린이용 자전거를 포장하는 용도라 내 자전거를 포장하기에는 사이즈가 너무 작았던 것이었다.
자전거 분해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중이었는데 애초에 이게 들어갈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대여섯 시가 지나는 시간 때여서 해는 또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물론 멘탈을 부여잡으려고 애는 썼지만 옥상에서 자전거니, 박스니, 공구니 이런저런 준비물들을 이곳저곳에 널브러뜨려 놓고 작업을 진행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막막함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다. 나중에야 익숙해졌지만 자전거를 분해하는 일은 또 왜 이리 진도가 나가지 않는지 바퀴를 분해하는 것까지는 수월했지만 페달을 분해하는 것이 각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말 그대로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았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페달 축 덕분에 어떻게 자세를 취하고 몽키스패너를 돌려야 이놈이 힘을 받는지 선뜻 이해되지가 않았다. 게다가 페달과 페달 축을 잇는 볼트 형태의 부분이 심히 꽉 조여져 있어서 아무리 힘을 줘도 풀리지가 않았다. 페달은 전체적인 자전거의 모습에서 혼자만 유독 튀어나온 부분이기 때문에 박스 포장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분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바퀴 분해, 바람 빼기와 더불어 항공사 홈페이지에 자전거 포장 관련 필수사항으로 게시되어 있는 항목이었다.
결국은 옥상에 흩뿌려둔 모든 것들을 계단 쪽으로 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집안에까지 다 들여놓고서야 작업이 마무리됐다. 부모님은 새 자전거 박스를 가지러 한 번 더 자전거 가게에 다녀와야 했고 나는 그 사이에 작업을 이어가야 했다. 어지간하면 부모님에게 부탁 비스무리한 걸 잘 하지 않는데, 촉박한 시간 때문에 그런 걸 따질 래야 따질 수가 없었다. 다행히 돌아가지 않던 페달은 아버지가 만지니 금세 돌아갔다. 판금 기술자의 시선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자전거 몸체에 뽁뽁이를 감싸는 작업을 했고 체중계로 무게를 제가면서 자전거와 캠핑용품 넣어보는 실험을 했다. 23kg가 넘지 않게 최대한 넣을 수 있는 물건들은 다 넣어 보면서 체중계에 포장된 박스를 올렸다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케리어를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박스에 넣지 않는 모든 품목은 비행기를 타고 환승하는 동안에는 페니어백에 넣어 손으로 들고 다녀야 함을 의미했고, 그래서 위탁수하물을 최대한 꽉 차게 활용해야만 했다.
그렇게 박스 포장을 하고 짐가방을 다 싼 시간이 아마 10시,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4박 5일의 워크숍과 왕복 제주도 비행의 피로감, 거기다 자전거 포장과 짐 챙기기로 인한 피로감이 종합적이고도 응축적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아있었지만 진이 다 빠지는 그 시점에서 그 나머지 일들이 미련처럼 느껴지지 않기란 쉽지 않았다. 구글맵 오프라인 지도 다운로드하기를 포기한 것은 그런 심리적 프로세스의 결과물이었다. 준비고 나발이고 극심한 피로감에 몸은 자동으로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