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동시에 스쿠터 대여점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마지막 숙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네시 즘이었다. 이름은 호텔이라고 하나 실상은 그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숙소는 오래된 3층짜리 건물이었다. 전부 둘러본 것은 아니지만 건물 2,3층에 객실이 들어차 있는 것 같았고 1층 중 일부 공간이 숙소 프런트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프런트를 제외한 다른 1층 공간에는 그와 관련 없는 상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숙소로 들어가는 1층 현관에는 이상하게 노인복지센터라는 문구와 촌스러워 보이는 스티커들이 여기저기 부착되어 있었다. 느낌상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된 복지센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객실은 투숙객에게 최소한의 기능만 제공하고 있었다. 2평 정도 될 것 같은 방의 중간에 싱글 침대가 자리 잡고 있었고 침대 정면에는 탁자와 티브이 냉장고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침대의 왼쪽은 창문, 그리고 그 맞은편 벽에는 자바라 옷걸이가 걸려있어 모자와 겉옷 정도를 간편하게 걸어 둘 수 있었다.
자바라 옷걸이 아래에는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다. 공간도 작은데 굳이 이런 것까지 비치시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벼운 느낌이 드는 가구들이었다. 의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사이에 있는 테이블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간신히 구색만 갖춘 무게감 이어 자칫 발을 잘못 디뎌 그 위로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종이 짝처럼 쉽게 뭉개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났다. 다리가 그렇게까지 얇은 테이블은 태어나서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루 종일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나름 지치는 일이어 대충 짐을 정리한 후에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여느 숙소가 그렇듯 텔레비전은 IPTV가 잘 작동했고 그 덕에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저녁식사 시간까지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83
일주일의 여행 동안 나름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식사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건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음을 넘어 좀 거나한 식사를 하고픈 마음이었다. 마치 하루 종일 몸을 쓰는 일을 한 뒤에 찾아오는 순도 높은 에너지 보충의 갈망을 헤비 한 식사로 해결하는 어느 현장 노동자들의 일상처럼 묵직하고 속이 꽉 차는 그런 식사가 왠지 모르게 당기고 있었다.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주변 맛집을 찾아보았다. 아직은 스쿠터를 가지고 있어 적당한 거리에 있는 식당까지는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거리와 동선을 고려한 맛집 탐색 결과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가정식 식당이 제주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결정되었다. 메뉴 목록에서 보이는 '공깃밥', '흑돼지김치찌개', '간장 불고기'등의 이름은 한국인으로서 끌릴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맛이자 전통의 라인업이었다. '가정식'이라는 단어가 허름하고 오래된 '기사식당'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적당히 세련되고 깔끔하여 보다 현대적인 감성으로 꾸며진 음식점이었다.
스쿠터 반납 시간이 저녁 일곱 시이니 대충 6시 30분까지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식당에 도착하면 여유로웠다. 다만 반납 전에 주유소에 들려서 기름을 채워야 하는 미션은 남아있었다. 대여한 스쿠터를 최종 반납하기 전에 기름을 채우는 것은 자연스럽게 내가 사용한 연료에 대한 정산이 되었다. 다행히 자동차보다 훨씬 작은 스쿠터의 연료통을 가득 채우는 것은 시간을 그리 많이 잡아먹는 일은 아니었다. 스쿠터를 반납하고 나서 다시 숙소까지 올 때는 두 발을 이용해 걸어올 생각이었다.
#84
가게 앞 한 구석에 스쿠터를 주차하고 들어간 가정식 식당은 실내가 살짝 어둑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홀에는 손님을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고 부엌 쪽에서만 인기척이 있었다. 하지만 그 조차 손님을 응대할 수 있는 연령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초등학생 정도로 판단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만이 아무도 없는 홀 쪽으로 세어 나오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정 중앙에 테이블 하나를 잡고 기다려 보았다. 시간이 남아돌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오래지 않아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중년의 아주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가게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간단한 인사를 건네며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뒤에주방으로부터 돌아온 아주머니와 기다리던 아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아주머니는 내가 자리 잡은 테이블로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메뉴판에는 구미를 당기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잔치 소불고기', '간장새우밥', '흑돼지김치찌개' 등 이름만으로도 침샘이 자극되는 음식들이 나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들은 훌륭한 1인 식사가 되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을 평범하게 장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메뉴판을 훑는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메뉴판 한쪽에는'잔치 소불고기 전골', '흑돼지 간장 불백', '흑돼지고추장 불백'등이 세트메뉴라는 이름으로 나열되어있었는데 가격이 모두 2만 원이 넘었고 공통적으로 흑돼지김치찌개, 미니 돈가스, 공깃밥 2개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돼지 간장 불백에는 간장 불백이, 흑돼지고추장 불백에는 고추장 불백이 함께 나오는 등의구성이었다.
평소에 '당신 참 많이 먹는다'는 평가를 자주 듣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음식의 질 때문이 아닌 양 때문에 2만 원이 넘는 구성의 식사를 독식(?)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무엇에 홀린 것인지 이미 내부적인 의결을 마친 나의 뇌는 아주머니에게 세트메뉴 '흑돼지 간장 불백'을 주문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미 머릿속은 그 다양한 음식들에 대한 상상으로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평범한 체격에 혼자서 세트메뉴를 먹겠다는 손님의 등장에 아주머니는 살짝 의아한 뉘앙스를 보이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85
배우 황정민이 다 차려진 밥상을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됐던 것처럼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이란 서빙되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흡입하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은 스마트폰으로 인근에 위치한 주유소를 찾는 일로 채워 넣었다. 식당과 스쿠터 대여점 사이에 있는 몇 군데의 주유소 중에서 가장 경제적인 경로 상에 있는 주유소를 연료 정산을 위한 경유지로 결정하였다.
이제는 정말로 음식만 먹으면 되는 순간. 하지만 묘한 기류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음식이 나오는 시간, 10분, 늦어야 15분, 정말 많이 봐줘도 20분 정도일까? 물론 방송 출연으로 전 국민의 시선을 받게 된 어느 맛집이라면 새벽부터 줄을 서 음식을 먹는 일도 흔한 일이지만 지금 이곳엔 손님도 거의 없고 메뉴도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또 30분이 지나도 음식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음식이 조금 늦게 나오는구나 하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30분을 향해가면서 초조한 마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주문한 음식은 40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테이블로 서빙되기에 이르렀다.
성인 남성으로서 밥 한 끼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2인분의 식사를 주문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내 입으로 2인분의 음식을 시켰다고 한들 그 주문한 음식을 잔반 한 톨 남기지 않고 몽땅 다 먹어야 한다는 법률 같은 건 없다. 또한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강요받을 일이거나 눈치 볼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묘하고도 미련한 자존심의 문제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미련한 자존심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불어오는 완전한 식사를 시도하고픈 마음의 관성에 몸을 맡기려는 순간이었다.
아주 예전에 세 바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정형돈과 데프콘이 나와 편의점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정형돈은 라면, 삼각김밥, 소시지, 볶음김치 등의 편의점 음식을 식탁에 전부 깔아 두고는 흡입하기 시작했는데 한 가지 음식이 채 목구멍을 넘어가기 전에 다른 음식을 입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며 정말로 쉴 틈이 없이 그 많은 음식을 제압해(?) 나간 적이 있다. 어느 정도는 웃기자고 행동한 쇼였을 수도 있겠지만 젓가락의 방향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 정형돈의 모습과 표정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한 것을 보면 어떤 의미로든 충격적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식사는 흡사 그 정형돈이었다. 손에 쥔 젓가락은 간장 불고기와 흑돼지 김치찌개와 돈가스와 밑반찬을 오갔다. 돈가스는 곁들여 나오는 반찬으로 그리 퀄리티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 조차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음식을 입 안에 넣을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전혀 없었다. 마치 그 모든 순서가 무의식의 수준에 기본 프로세스로 내장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음식을 연거푸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직 입안에 남아있는 음식물이 추가로 들어온 다른 음식물에 의해 자리를 잃어 목구멍으로 좌천되는 형국이 식사시간 동안 계속해서 이어져갔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본 적은 이제껏 없었던 느낌이었다. 인생에서 배고픔이 가장 왕성한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육군 논산 훈련소 훈련병 시절에도 그렇게까지 무식하게 식사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된 훈련으로 인해 그때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실질적으로 에너지 보충이 필요했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속도에 자비가 없었던 것만큼 위기의 순간도 빠르게 찾아왔다. 밥 한 공기를 클리어하고 두 번째 공기마저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식사의 파트너가 책임져야 할 두 번째 공깃밥은 절반 정도를 먹는 것이 한계였다. 불고기와 김치찌개 그리고 돈가스까지, 메인 메뉴라 할 수 있는 음식 삼각편대 중 그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자 그중 가장 수준 이하였던 돈가스는 자연스럽게 선택으로부터 도태되기 시작했다. 함께 나온 상추쌈까지도 결코 열외 시키지 않는 결의에 찬 태도 속에 배는 급속도로 불러갔고 음식을 향하는 젓가락질의 속도도 점차 느려져가기 시작했다. 식탁은 이미 줄어든 음식의 양만큼 미련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여행의 마지막을 객기로 채운 남자의 식사는 누구도 승부를 걸지 않았지만 스스로 패배한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그렇게 마무리되어갔다. 주유소에 들른 후 7시까지 스쿠터 대여점에 도착하려면 이제 그만 식당을 나서야만 했다.
#86
스쿠터는 약속된 시간인 7시가 되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들른 주유소에서 기름통에 기름을 가득 채운 비용은 대략 6천 원 정도에 불과했다. 대여비를 제외한 단순 연료비에 불과했지만 2박 3일 동안 한 사람의 이동을 완전히 책임져준 대가 치고는 아주 저렴하게 느껴졌다. 대여소의 직원은 가게 앞 도로 한편에 주차된 스쿠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헬멧만 가게 안쪽 바닥에 내려놓으면 반납이 완료된다 하였다. 직원이 가리킨 곳에는 돗자리가 깔려있었고 그 위에 이미 반납된 듯한 헬멧들이 이리저리 놓여있었다.
배는 더부룩했고 불편했다. 스쿠터를 반납한 뒤에 숙소까지 걸어가고자 했던 생각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소화를 시키며 스스로 자초한 불쾌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대여점에서 숙소까지의 직선 길이 아닌 해안가를 경유하여 돌아가는 경로로 걷기 시작했다. 대여점 바로 앞에서부터 이어지는 용연계곡을 가로지르는 용연구름다리를 건너니 오른쪽에 횟집들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제주올레길 17코스 동한두기 길이 나왔고, 그 반대로 바다 저쪽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강렬한 햇빛을 반사시키는 바닷물에는 한줄기의 금물결이 만들어졌는데 그 황혼은 여행의 종료를 상징하는 듯 보였다.
짧은 해안코스를 한 바퀴 돈 뒤에는 다시 내륙의 숙소를 향해 걸었다. 이리저리 횡단보도를 가로지르고 인도를 걸으며 숙소와의 남은 거리를 줄여나갔고 그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제주와의 이별의 시간도 그만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길 위에서 불현듯 쳐다본 하늘은 흐린 빛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비행기 하나가 저 멀리서 나보다 먼저 제주를 떠나고 있었다. 나늘 품었던 제주라는 섬은 다시금 나를 토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