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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Mar 05. 2021

오네시모에게서 편지가 왔다

완전한 용서의 7가지 증거


어떻게 해도 안될 것 같은 것이 있다.


줄곧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다가도, 불쑥 내 안에 한 버튼이 눌려지면, 잔잔한 물 위의 초대받지 못한 작은 파문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쓰나미로 끝나버리고 만다.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 용서하지 못한 자의 실형은 훨씬 더 크고 무겁다.




성경에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골로새 사람으로, 골로새 교회는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살 정도로 부유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베풀며 많은 존경을 받기도 했다. 특히 바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나의 사랑하는 동역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쓸모 있는, 귀중한"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오네시모는 빌레몬으로부터 무언가 소중한 것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 당시 법으로, 주인의 소유물 된 종이 달아난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데, 절도까지 했으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도주하다 붙잡힌 오네시모는 마침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빌레몬의 절친) 바로 옆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계획하실 수 있는 세팅이다.



나에게도 오네시모가 있다. 선한 의도로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돌아온 것은 박탈감. 바로 그 "stolen" 훔쳐가 버렸다는 상실감이었다. 순종하는 기쁨으로 건네었던 마음과 기회들이 질투와 배신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관계를 빼앗겼고 선의를 짓밣혔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느낌과 감정이란 참 유약한 것이어서, 그것이 온전한 사실이 아닐지라도 한번 감정에 그늘이 드리워진 순간 끝없는 어둠 속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그렇게 몇 년을 가슴앓이한 후, 나는 오네시모를 볼 때마다 도망을 갔다.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되지가 않아서. 자꾸만 쓰나미 속으로 말려드는 내 모습이 실망스러워서. 그냥 덮어두고 모른 척 살아가고 싶어서.



며칠 전 목요일 새벽, 좋은 것을 보고 있는데 문득 나의 오네시모 생각이 났다. '아, 왜 그 사람 생각이 나지...'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찰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윤승아, 넌 아브라함의 씨잖아. 복의 근원, 그게 너잖아.' '오, 아닌데요. 복의 근원 하고 싶은 건 맞는데 그 부분에선 전 이미 할 만큼 했어요.' 애써 외면하며 새벽기도 말씀을 듣는데 또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을 때는 축복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마음에 와서 박히는 구절이라 받아 적어 놓고도, '음.. 너무 잘 들리는데 너무 듣기가 싫으네' 하며 공책을 덮어버렸다. 이렇듯 의지적인 불순종은 그날 나의 하루를 온전히 망쳐버렸다. 기운이 없고 우울했다.


금요일 새벽, 다시 말씀을 펴고 그날 QT 구절을 보는데, 본문이 바로 빌레몬서의 말씀이었다. 왜 일부러 찾지도 않는데 꼭 이런 말씀이 떨어지냐는 말이다. 왜. 왜. 왜! 빌레몬서가 용서에 대한 주제란 걸 알고 있던 나로서는, 본문을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 끈질기셔.. 지금 그러니까. 결국 용서 하라시는 거잖아요.' 매우 삐딱한 자세로 말씀을 읽던 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I did not want to make this decision without your conset, so that your act of kindness would not be a matter of obligation but out of willingness" (빌레몬서 1:14).


"딸아, 네가 어제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아. 나는 오히려 너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구나. 나는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내가 너의 아픔을 알고 너의 상처를 알기 때문이야. 나는 너를 낫게 해주고 싶어.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덮기에 충분하단다. 너에게 부어지는 나의 은혜는 계속 차고 넘치고 있어. 네가 나의 말을 듣는다면 그건 내가 명령해서가 아니라, 네가 나의 사랑받는 딸이기 때문일 거야."


너무나 익숙한 아버지의 음성. 나를 몰아세우고 명령하고 비난하는 음성이 아니라, 나를 어루만지시고 기다리시는 그 따뜻한 음성은 그날 나의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토요일 새벽. 내 마음의 빗장이 얼마나 견고하던지, 아직은 문을 살짝밖에 열지 못하던 나에게 또다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너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If he has stolen anything from you or owes you anything, just place it on my account. I promise to pay you back everything, to say nothing of the fact that you owe me your very self" (빌레몬서 1:18-19).


내 마음에 깊이 박혀있던 한 단어 "stolen"을 명확히 언급하시며 말씀하셨다. "윤승아, 내가 대신 갚을게. 네가 느끼는 상실감과 불의함에서 오는 상처들을 내가 다 알고 있어. 그 모든 것을 내 앞으로 돌려주렴. 반드시 채워줄게. 하지만 사실은 너도 나에게는 오네시모야. 나도 너에 대해 그런 값을 치렀단다."


눈물조차 나지 않는 그 새벽, 나는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나의 인색함을 내어 드리고 그분의 후함을 받아 드릴 것인지.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침이 되자, 오랫동안 교류가 없던 나의 오네시모에게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그저 "잘 지내니?"의 안부인사 정도가 아닌, 울면서 써 내려간 장문의 메시지였다. 지난 며칠간 용서에 대한 나의 마음을 준비시키신 하나님은, 같은 시각에 그분의 마음에도 동일한 말씀과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계신 거였다. 나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 왜 그랬었는지, 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붙드셨는지. 그리고 왜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지.




오후가 되도록 답장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명확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앞섰다. 또 상처 받으면 어떡하죠? 또 반복되면 어떡해요? 나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앉혀놓고 하나님께 물어봤을 때 그분은 대답하셨다.


"딸아, 네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단다. 원래 다니던 편하고 익숙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어. 너는 그 익숙한 길 위에서 사슬에 묶인 채로 걷고 있구나. 나는 여전히 너와 함께고 너를 절대 떠나지 않을 테지만, 결박된 채로 걷는 그 길은 참 무겁고 오래 걸리는 여정이 될 거야. 그 무거운 마음을 안고 걷느라, 달려 나가야 할 힘과 기쁨이 쉽게 소진되는구나. 그 길 위에서조차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고, 곳곳에서 너와 만나 줄 거야. 하지만 너의 묶인 발걸음은 무겁고 지칠 거란다.



여기 또 다른 길이 있어. 이 길에서 너는 올무에서 놓인 사슴처럼, 새장 밖으로 풀려난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는구나. 아무것도 너를 끌어내리지 않아. 내 바람이 너의 날개를 드높히 날게 하고, 너는 독수리처럼 목적지를 향해 빨리 날아갈 수 있단다.



둘 중 어느 길로 선택하던, 나는 너를 절대 떠나지 않고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거야. 하지만 너는 내 딸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기쁨으로 나는 새처럼 훨훨 날아올랐으면 좋겠구나. 용서가 있는 곳엔 감사가 있단다. 감사가 있으면 자유가 있고, 결박이 풀어지며, 드디어 나의 새로운 숨결이 너에게 들어갈 수 있어. 내가 너를 향한 선한 계획이 있다는 걸 믿어주겠니? 네가 할 용서의 대가를 내가 이미 지불했다는 걸 믿어주겠니? 나는 지금보다 널 더 많이 축복하고 싶고, 내 사랑은 그 어떤 두려움도 다 덮을 만큼 넓다는 것을 믿어주겠니?"



"네, 아빠." 너무나 따뜻하고 인격적인 그분의 음성 앞에, 그분의 한없이 좋으심 앞에 나는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나의 길이 아닌 완전하신 그분의 길을 선택할 용기를 얻은 데에는, 갑자기 내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여전히 두렵고 떨리지만, 용서는 믿음에 근거한 결단이라는 깨달음 덕분이었다.


곧바로 나의 오네시모에게 내 진심을 담은 답장을 보낼 수 있었고, 우리는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가시를 보는 시간을 통과해, 이제는 그 가시덤불을 벗어나 함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역자가 된 것이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25년간 목회를 하신 R.T. Kendall 목사님의 Total Forgiveness라는 책에 보면, <완전한 용서의 7가지 증거>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으로 하는 feel-good 용서 말고, 진정 완전한 용서를 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증거 1: 그들이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증거 2: 그들로 하여금 나를 두려워하거나 나 때문에 긴장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증거 3: 그들로 하여금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

증거 4: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체면을 살려준다 (그들의 실수를 덮어준다).

증거 5: 그들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지켜준다.

증거 6: 용서는 종신형이다 (한평생 하는 것이다).

증거 7: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해준다.


이것은 요셉이 형들에게 베푼 용서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용서다. 이 7가지 증거 중에, 나의 증거는 어디에 해당되는지, 해당되는 것이 있기는 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 어느 것에도 한참을 못 미친다. 하지만 나의 아주 작은 결단이 예수님의 완전한 용서에 가 닿는 시작점이 되길 기도한다. 당장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이고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 글은 나의 시작의 증거이다.




빌레몬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사랑을 품은 자"이다. "입맞춤"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간장 종지 같은 마음의 그릇을 가진 나에게, 옹졸함과 편협함으로 똘똘 뭉친 나에게, 하나님은 "아니야. 넌 내 사랑을 품은 자야"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이름이 내 이름이 될 때, 나는 그분의 사랑에 입맞춤한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나의 술람미 여인

나의 빌레몬아

일어나

이제 내 길 위에서 함께 가자




우리 삶에는 모두 크고 작은 오네시모들이 있다. 하지만 "나의 빌레몬아"라고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반응할 때, 우리는 오네시모 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열매 맺은 사람들이 된다. 이 새벽에도 나의 오네시모를 축복한다. 그분에게 부어진 은혜의 강물이 계속해서 넘쳐나기를. 그 안에 생명과 기쁨이 가득하길. 이 길을 오래도록 함께 걷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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