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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May 05. 2019

아침형 엄마와 저녁형 딸의 동유럽 여행

모녀 여행, 빠르게 걷지 않은 여행

이런 여행은 처음이다. 

건물이나 풍경보다 사람이 보이는 시간
여행지에서의 새로움보다 옆에서 걷는 엄마를 발견하는 시간
아무 곳에서 멈춰도 함께 한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시간


2019년 4월, 엄마와 처음으로 단둘이 떠나는 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프라하에서 시작해서 부다페스트로 끝나는 9일간의 동유럽 여행


너무 빨리 걷지 말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어라

라는 아프리카 격언처럼


빨리 걷지 않은 여행, 모녀 여행을 정리해본다. 


1. 다르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바로 잠이 드는 엄마와 늦은 밤까지 뒤척이며 내일을 준비하는 딸. 

아침 일찍 일어나 사진을 다시 보고 일기를 쓰는 엄마와 일어나 준비를 마친 엄마를 보고는 서둘러 준비하는 딸. 

아침형 엄마와 저녁형 딸은 서로를 재우고 깨우지 않고 기다리며 함께 하는 여행의 템포를 맞춰갔다. 


 프라하 페트리진 공원의 벚꽃 벤치 (지금 엄마와 나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2. 말해본다


서로 굳이 꺼내지 않고 이겨냈던 어려움들을 시간이 지나고 말해본다. 트램을 타고 5정거장을 가며, 다뉴브 강가를 걸으며, 카를교를 걸으며, 여정의 사이사이 떠오르는 고마웠던 기억과 서운했던 순간을 꺼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 내 나이에 엄마는 이미 두 아이를 가졌다. 회사를 다녔다. 이 두 마디만으로도 눈물이 맺힌다. 


나는 이토록 자유롭고 풍족한 환경에서 회사만 다녀도 힘든데 도대체 엄마는 어떻게 해낸거지. 지난 어려움들을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일주일만에 결정해 쉽게 모녀여행을 올 정도로 안정된 지금이 너무 좋다는 결론으로 대화는 끝난다. 


3. 물어본다


괜찮아? 힘들어? 배고파? 안 피곤해? 걸어갈까? 쉬었다 갈까?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속에서 엄마의 현재 상태를 끊임없이 살피며 물어본다. 

그 땐 왜 그랬던거야? 안 힘들었어? 어떻게 해냈어? 왜 그랬어? 알고 싶었던, 꼭 다시 감사하고 싶었던, 엄마의 과거를 꺼내며 물어본다. 


마지막 날 밤, 저녁 식사 예약을 취소했다. 다뉴브 강 야경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가 너무 좋아서


초등학생 때 엄마 회사가 초등학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로 가까웠다. 토요일마다 일찍 퇴근하는 엄마 사무실에 찾아갔다. 건물 1층에 파파이스가 있어서 꼭 간 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토요일마다 엄마 회사 찾아간거 안 싫었어? 눈치 안보였어?" 엄마는 좋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주 5일제가 당연하니까 토요일에도 어떻게 일했나 싶지만 그때는 토요일에 일찍 끝나면 마치 일을 안한거 같았다고. 내가 와서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좋았고, 파파이스를 기대하며 찾아온 나에게 치킨 한 조각을 사 쥐어주는 것도 참 좋았다고 한다. 지금도 토요일에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과 집에 가는 길에 먹던 파파이스는 생생하게 기억난다. 참 따듯했다. 


4. 발견한다


오래 걸으면 엄마의 허리가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처음 알았다. 골반 위 허리 아래쪽 V자 근육. 컨디션이 안 좋은 날 내가 아픈 부위와 똑같아서 놀란다. 엄마는 되려 나를 걱정한다. "너 벌써부터 거기 아프면 나중에 큰일이야. 필라테스 절대 그만두지 말고 앞으로 10년 넘게 꾸준히 해야 돼." 9일 동안 매일 아침 엄마의 허리에 파스를 붙여 주었다.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리고 지금껏 이 순간을 만들지 않은게 참 미안했다.   


5. 칭찬한다


평소 서로를 향한 말과 표현이 많지 않은 모녀다. 항상 서로 생각하고 아끼는 걸 알지만 서로를 향해 드러내는 표현은 어색하고 서투르다. 여행 첫날 비행기에서 결심했다. 작은 칭찬이라도 작은 기쁨이라도 꼭 꺼내고 말하기로.  


엄마 귀여워! 엄마 음식 안 가리고 되게 잘 먹는다! 엄마 저거 어떻게 알았어? 엄마 눈치 엄청 빠르다! 엄마 사진 잘 찍는다! 엄마 글씨 되게 잘 쓴다! 엄마 오늘 예쁘다! 칭찬을 하며 엄마의 귀여운 미소를 볼 수 있어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사진.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에서 엄마와 함께 한 밤(좌) 비행기에서 테트리스를 하는 엄마가 너무 귀여웠다(우)


6. 닮다


사진을 찍으면 꼭 붙어있는 얼굴의 눈코입도, 좋아하는 걸 발견하면 피어나는 웃음도, 도시보다 자연에 감탄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숨은 명소를 더 좋아하는 선호도, 힘들 때 나오는 습관도, 짜증이 날 때 참지만 드러나는 표정도 참 닮았다. 닮은 서로를 발견하고는 한 번 더 놀라고, 소중해진다. 서로를 이해해본다. 


세상에서 가장 닮은 둘이서, 함께, 꼭 붙어서


같은 온도까지. 손이 따듯한 엄마와 항상 손이 차가운 딸, 예상보다 추운 동유럽을 걸으며 엄마와 딸은 꼭 붙어 있었다. 엄마는 차가운 내 손을 항상 꼭 잡고 따듯해질 때까지 데워주었다. 


7. 바라본다 


같이 한 방향을 보고 걷는다. 여행에서는 한 공간에 멈춰 서로 마주할 순간이 많았다. 가장 좋았던 순간은 구시가지 광장에서 프라하 성으로 건너가기 위해 탄 트램 안에서 마주 앉아 창 밖을 함께 바라본 아침이다. 

프라하 트램에서 엄마와 마주 앉아 블타바 강을 건넌다.


할슈타트에서 비엔나로 넘어가며 마주 앉은 OBB기차도 좋았다. 창 밖에는 오스트리아의 호수와 숲 속 마을이 펼쳐지고 몸은 기차 안에 편하게 앉아 마주보며 자연을 함께 감상하던 시간. 


사진을 찍을 때도 5초 이상 서로를 바라보고 웃으며 얼굴을 쳐다본다. 우리 엄마 웃으면 이렇지. 우리 엄마 눈 코 입을 바라보는 그 찰나의 순간이 찬란했다. 


체스키 크룸로프 전망대에서. 흐린 날씨에도 동화같이 아기자기한 마을을 걸으며 참 좋았다. 


여행이 끝나가는 무렵, 부다페스트에서 이 말을 엄마와 함께 보았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수상한 배우 김혜자의 수상소감이었다. 


오늘을 사세요. 눈이 부시게!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내 삶은 때론 불행하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에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동유럽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우리지만 분명 삶이 힘든 순간이 있었다. 각자 직면한 현실로 힘든 순간에는 정작 서로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지켜보고 안타까워하고 마음속으로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오늘이 더 소중했다. 눈이 부실만큼.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엄마에게 항상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요.
사랑해요 엄마


부다페스트에서 엄마가 가장 좋아한 플라워 카페 Cafe Arioso. 이번 어버이날은 꽃갈피 만들어 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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