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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Dec 16. 2018

베트남, 국민영웅 호치민부터 알아가기

나는 베트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올해 2월 베트남이라는 국가에 출장으로 처음 방문했고, 이번 달에 다시 한 번 오게 되었다. 1년에 두 번이나 한 국가, 그것도 같은 도시 호치민에 방문하는게 흔한 일은 아니다. 갑작스레 잡힌 출장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베트남이라는 국가를, 호치민이라는 시티를, 베트남 지사를 포함한 현지인들을 더 이해해야 했다.  


호치민으로 향하는 심야 비행기 안에서 내가 아는 베트남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축구 열풍, 한국의 2배쯤 되는 9600만명의 인구, 국가 평균연령 30세, 6.8%대의 경쟁성장률, 호치민과 하노이의 도시 차이(미디어 에이전시가 더 많은 남쪽 호치민, 정부기관이 많은 북쪽 하노이, 역사와 정치 차이. 무슨 차이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름), 휴양지 다낭, 쌀국수와 분짜, 반쎄오와 신또, 오토바이, 대기오염, 신호등이 없는 차도, 공휴일이 상대적으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 비해 적음,  미백에 관심이 많음, 항공권을 오프라인에서도 구매함, 셀럽과 인플루언서의 경계가 크지 않음, 공휴일이 상대적으로 타 동남아시아 국가에 비해 적음.


이런 파편적인 정보가 전부다. 일을 하다보면 동남아시아를 비롯해서 베트남이라는 국가에 대해 파편적인 정보도 갖지 못한 한국인과 진출 기업들이 많고, 관련 일을 하는 나 또한 부족함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당장 눈 앞의 업무 해결에 지쳐 의문 제기를 막아 두었던 호기심을 살리고, 베트남에 대해 1주일동안 꼬리물기로 들여다봤다. 



국민 영웅 호치민부터 들여다보


호치민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항공사의 매거진을 펼쳤다. 이번 달의 여행지 기사 중 하노이가 있었다. 내가 가는 호치민 기사였다면 좋았을 것을 하며 기사를 읽다가 <베트남의 영웅 ‘호찌민’의 흔적> 이라는 제목에서 멈췄다. 내가 가는 곳이 호치민인데 호치민의 흔적이 하노이에? 사람 호치민 - 도시 호치민 - 도시 하노이 사이의 관계를 이번 기회에 꼬리를 물고 정리해 봐야겠다. 


"베트남 곳곳에 호찌민 박물관이 있지만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 (Ho Chi Minh Museum)이 가장 크다." 

왜 호찌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시보다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이 더 큰 걸까? 그 업적에 대해 듣고 까먹고 듣고 까먹고를 반복하던 호찌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를 마저 읽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은 호찌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0년에 건립됐다."

1890년 생에 나랑 100살 차이라면 할아버지의 아버지쯤 사람이군. 이 박물관에는 호찌민이 기자였을 때 쓴 기사와 시 등, 그의 모든 업적을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호찌민이 기자였구나. 사회이슈에 대해 먼저 들여다보고 나서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었겠구나. 


"호찌민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대신 그의 생을 기리기 위해 시신을 특수 처리해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저택을 없애는 유언 문제로 시끄러웠던 리셴룽 총리와 형제들의 분쟁이 떠올랐다. 동남아시아 유명인들은 왜 이렇게 태워 없애버리는 걸 좋아하는걸까. 어떤 문화적 이유가 숨어 있는 것 일까. 자신을 과도하게 숭배하거나 기리지 말라? 원없이 한 생애를 살았으니 남겨두고 갈 필요가 없다? 한국의 과거 유명인들은 좀 더 긴 역사 동안 자취를 남기고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리고 싶어하지 (심지어 공식적인 직책과 업적이 다 끝낸 후에 다시 한번 과거의 업적을 더 알리기 위해 새로운 기념관이 세워지곤 한다.)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고 싶어하지 않는데 큰 차이로 다가왔다. 한편 시신을 화장하라는 유언에도 시신을 특수 처리해 방문객들이 볼 수 있게 보존하고 있다는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 자기 한 몸에 대한 개인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과연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한 문단의 글을 읽고 호치민에 대한 궁금증은 커졌다. 그리고 호치민 Than Son Nhat 공항에 도착했다. 


1. 어떻게 도시 이름이 호치민이 되었을까? 


호치민 시청과 시청 앞 광장 중앙에 위치한 호치민 동상


‘사이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이 도시는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되자 혁명가 호치민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국인에게도 월남전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베트남의 통일 전쟁은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과 사회주의 노선을 고집한 북베트남의 싸움이었고 1975년 북베트남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고 통일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통일 정부는 수년을 끌었던 전쟁 끝에 함락된 도시 사이공에 베트남 국민 영웅 호치민의 이름을 수여했다. 


당시 이름을 바꾼 사유에 대해 공식적으로 설명한 자료는 없지만 사이공이 남베트남 저항 역사의 중심지(수도)였다는 점, 사이공을 비롯해 주변의 소도시들이 함께 호치민 시에 포함되며 통합된 이름이 필요했다는 점, 여기에 호치민이라는 국민 영웅을 기리며 남베트남을 통합하고자 한 통일정부의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호치민은 본명이 아니다. 호치민은 '성공할 사람' 이라는 의미의 이름 (Nguyen Tat Thanh, 응우엔 탓 단)을 버리고 1942년부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의 호치민(Ho Chi Minh)을 쓰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가명, 필명이 160여개나 되었다고 하는데 1942년 중국에 투쟁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체포, 투옥되는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민족의 각성을 염원하며 가명인 호찌민을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2. 사람 호치민은 혁명가이기 이전에 탐험가였구나


호치민은 남부도시 사이공이 아닌 중부,  호앙쭈(Hoang Tru)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도 농민출신의 평범한 지식인이었던 호치민은 1911년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의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1914~1919년까지는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하인, 견습공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와 민족주의적 가치관은 급속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용기있는 사람이구나. 가난한 집안에서 공산주의의 베트남에서 서구로 나가겠다는 생각을, 쉽지 않은 결정을 어린 나이에 내린 사람이구나. 그리고 견습 요리사라는 가능한 수단을 택해 행동에 옮겼구나. 그는 용기는 일생 내내 보인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연합국 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갔고, 윌슨에게는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편지를 쓴다. 


'용기'는 결과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모'하다고 평가된다.

 

납세거부 시위에 참여해 국학에서 퇴학당한 '무모'한 학생 호치민은 '용기'있게 세계 교육으로 눈을 돌렸고,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는 '무모한' 선택은 식민지 하 국민이 행동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였다. 


그는 새로운 걸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어했구나. 새삼 그가 인생의 중반기에 선택한 '깨우치는 자'라는 이름이 와닿는다. 


노란색이 상징적인 호치민 중앙 우체국과 내부 중앙에 걸려있는 호치민 주석의 사진


노란색 건물 외벽이 상징적인 호치민시 중앙 우체국.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축되었으며 파리 에펠탑로 유명한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의 작품이어서 주요 관광지기도 하다. 


세계로 나가는 우편물이 모이는 이 곳의 정 중앙에 호치민의 사진이 걸려있다. 세계를 바라보며 그는 지금의 베트남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릴까. 


3. 호치민은 불보다는 '물'을 닮은 리더구나


금성홍기를 보고 베트남에 대한 선입견으로 공산주의, 국기의 빨강색에서 보이듯 불같고 엄격하며 통제가 익숙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반면, 호치민은 혁명을 이끌었지만 불보다는 물 같은 리더였다. 



호치민은 스스로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대가없는 사랑을 베풀기로 유명했고 가진 것 없는 식민지 하 베트남인들을 위해 싸우며 권력의 부귀영화와 안락을 끝까지 취하지 않았다. 이런 호치민을 베트남 사람들은 '호 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기도 한다. 최근 베트남 축구 열풍을 이끈 대표팀의 박항서 감독을 '파파'라고 부르는 베트남인들을 보며 친근하고 따듯한 리더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과 마음이 느껴졌다.   


비행기에서 읽은 기사 속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유언한 호치민이 좀 더 생생하게, 따듯한 물처럼 감싸진다. 

 

마땅히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 하나로도 성공한다.

호치민, <옥중일기> 


혁명가 호치민은 단호하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했지만, 그는 인생이 길 하나로 때 하나로 달라짐을 알고 있었다. 물 흐르듯 소박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호치민의 여유 있는 성격이 무리하지 않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했다는 윌리엄 J. 듀이커(호치민 평전 저자)의 평가에 그를 닮은 정치적 리더가 한국에서도 그리워진다. 


이번 방문에는 '호치민 박물관'에 들리지 못했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대해 애정과 존경심이 생긴 만큼 다음에 호치민에 오면 꼭 들려봐야겠다. 그때까지는 그의 사회의식과 동시에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이 시집을 읽어봐야겠다. 




베트남 들여다보기 첫번째 글,

베트남 축구열풍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의 글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한 글들 (네이버 캐스트, 지식백과)

함께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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