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만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오랜만에 퇴근 후 따로 1시간 넘게 시간을 들여 쓴 이메일이 있다.
맥락을 공유하자면, 최근에 새로운 팀의 팀장을 맡았다. 현재 팀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빠르게 파악하고, 6월까지 2분기 타임라인 대비 진척이 더딘 프로젝트 두 개에서 결과물을 공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실상 공유할 수 있는 수준의 결과물을 한 달 안에 빠르게 만들라는 말이다. 이 요청이 위에서 새 팀장인 나에게 콕 집어서 떨어진 데는 기존에 팀의 프로젝트 타임라인 관리, 문제 해결 방식과 프로젝트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왜 프로젝트가 지연되는지 들어보니 역시나 '만들어내고 싶은 결과물이 불명확'하고, '리소스의 부족 (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원맨팀인 상황)'에 더해 '문제의 난이도가 매출 상승과 리스크 관리의 트레이오프 발생으로 높음', '다양한 이해관계자/팀 조율이 필요하나 어떻게 인플루언스 할지 모르고 커뮤니케이션에 집중적인 노력을 투입하지 않음' 등의 문제가 있었다. 문제의 난이도가 높은 프로젝트라는 커뮤니케이션도, 이 팀에서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 이해관계자/팀과의 조율을 도와달라는 커뮤니케이션도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담당자는 '어렵다. 나 혼자 이걸 어떻게 결정해. 다른 팀은 왜 리스크 안 지고 우리 팀만 져야 돼.' 하는 생각이 커지며 지치고 점차 방향을 잃어갔다. 담당자가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에 자신감이 높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이걸 파악하는 과정에서 프로젝트 속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중요도, 난이도(복잡도), 필요한 리소스, 이해관계자/팀을 파악하는데 정보가 정리된 문서나 오픈 채널이 없어 담당자의 입에 의존해야 했고, 이건 나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한 공유를 요청한 본사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담당자가 먼저 커뮤니케이션하지 않는 이상 시간이 없는 그들은 분기에 한 번이나 담당자의 성과 보고서로 진척 사항을 알게 되고 결국 타임라인 대비 완료가 되지 못한 채 다음 분기의 과제로 넘어가는 프로젝트. 과거엔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던 이 프로젝트가 최근 관련 매출 상승과 동시에 관련 이슈도 함께 증가하며 우선순위가 갑자기 이번 달부터 높아진 상황이었다. 양 쪽 다 문제를 풀고는 싶지만 투입할 리소스는 부족한 상황에서, 나는 '리소스'로 더해졌고, 풀지 못하고 있던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
"매출 상승과 리스크 관리의 트레이오프 상황 속 둘 다 지키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 있어?"
라는 1줄의 질문이었다.
새 팀의 팀장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장 이메일로 본사와 확실히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Thank you for raising an important question.
1. 방법을 찾고 싶다는 팀의 의지 (우리는 같은 편!) - 본사는 충분히 커뮤니케이션하지 않는 담당자가 새로운 방법을 찾기보다 방어적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담당자와 1시간 넘게 프로젝트에 대한 솔직한 토의를 했고, 우리 팀의 태도를 정했다. 과거와 달리 최근 관련 매출의 상승으로 우선순위가 높아진 달라진 상황이고, 이때 우리는 "도와준다. 뭘 어떻게 도와줄지 방법을 우리도 찾을 건데 이해 관계자인 너희도 함께 찾아줘. 어려운 문제니 같이 찾자"의 자세로 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중요도가 높은 문제는 항상 해결을 위해 듣고 돕고 분석하고 방법을 찾아주는 팀"이 될 거라고 선언했다. 선언 후에는 실제로 산출물을 내야 팀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다.
2. 주관적인 선택이 아닌, 데이터 기반의 결정 (필요한 데이터 분석과 리서치를 할게!) - 상황을 봤을 때 문제의 중요성과 난이도에 대한 여러 팀의 이해도가 상이했다. 근데 한 번도 관련된 어려운 상황을 데이터와 함께 정리해서 공유한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 지금 당장 쉽게 떠오르는 새로운 방법은 없다. (우리뿐만 아니라 질문을 한 본사도 방법을 몰라서 질문을 한 거다).
하지만 방법을 찾으려면 결국 현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현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머릿속에서 말고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아직 각 잡고 하지 않은 채 각자의 이해 관계과 의견을 따로따로 키워가고 있었다. 우리 팀이 프로젝트를 둘러싼 중요한 가치와 리스크 (매출, 파트너 리스크, 법적 리스크, 프로덕트 리스크)를 가시적으로 한 시트에 정리하기로 했다. 우리가 시간을 써야 하는 데이터다.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하고, 데이터 기반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팀으로서 무기를 갖는다. 문제를 노력해 풀겠다는 팀의 의지를 보여주는 액션이기도 하다. 데이터를 보면 검토할 옵션을 만들 수 있다는 책임감을 갖고 시간을 투자해본다.
3.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인데 이해관계자/팀 리소스 투입이 현저히 부족했던 상황 (도와줘!) - 팀원이 콕 집어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건 새 팀의 팀장인 내가 다른 팀의 높은 분들까지 바로 인플루언스 하며 투입을 갑자기 요청(?)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꼭 도와줘야 하는 부분은 맞다. 떠오른 방법은 이 질문을 한 더 높은 임원이 중요성을 공표하고, 다른 팀을 초대하고, 여러 팀이 공통의 목표 하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고 옵션을 검토하는 어려운 논의에 필요성과 힘을 실어줘야 한다. 제일 시간을 많이 쓴 문단이 공손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 문단이었다.
"새 팀의 팀장으로서 내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회사의 내부 입장은 뭐야?" "그 입장이 있어야 우리 팀도 얼라인해서 회사에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데 그게 분명하지 않아서 어려워. 알려줘. (사실 없다는 거 나도 알고 상대도 안다). 만약 없다면 없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그걸 함께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 지금인 것 같아.". 회사의 입장을 모르고 한 팀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내려서도 안 되는 규모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설명했다. VP는 뻔한 내 의도를 바로 알아듣고 딱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도와주겠다고 답장했다.
이제 프로젝트를 리드하며, 문제를 둘러싼 필요한 정보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결책들의 리스크-리워드 분석하고, 이해관계자/팀 커뮤니케이션에 공을 들이고, 적재적소에 도움을 요청하고 받고, 책임을 분산 또는 집중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그 과정을 다음 주에 몰입하는 일이 남았다.
이 글을 쓴 이유기도 한데, 커리어를 쌓아가며 마음속에 꾹 담아두고 힘들 때마다 꺼내는 결정적인 피드백들이 있다. 오랜만에 꺼내고 적어두고 싶었다.
주니어 시절 칭찬이 참 귀하던 그때, 들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영원힌 잊지 않고 내 강점으로 가져갈 피드백은 동료들로부터 "Alicia님 이메일 보고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는지 많이 배워요."라는 말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나는 70%의 언어 능력치로 살아간다. (80%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자신감이 70%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만에 공들여 쓴 이메일 하나가 특별하다. 이 이메일의 답장으로 VP로부터 이 문제를 이렇게 깊게 들여다보고 구조화된 대답을 해줘서 고맙다고, 상황과 제시한 접근법과 넥스트 스텝에 대해 모두 동의하고, 나는 가장 어렵다고 말한 이 부분을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아! 오랜만에 내가 가진 능력을 하나 꺼내 쓴 것 같다. 숨은 (하지만 노골적인) 목표였던 난이도 인정과 도움 요청에 응답을 받았다.
이제 팀은 혼자가 아니다. '같이' 푸는 과정에 더 노력하고 집중해 보면 된다. 분명 다시 리소스 부족, 이해관계자/팀의 챌린지, 의견의 충돌, 방법의 부족 등을 겪겠지만 이건 어려운 프로젝트의 숙명이다.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니 우리 팀이 노력해 볼 만한다. 우리가 문제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고 우리가 못 만들면 회사에서 다른 누구도 더 빠르게 잘 못 만든다.
5년 차, 회사에서 맡게 되는 일과 역할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한 결정적인 피드백이 있다.
"Alicia는 회사가 어려운 문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에요". "왜 나는 힘든 일만 맡지?"에서 "나는 회사가 어려운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구나"로 생각이 바뀌었다. 매니저가 되고 더더욱 깨달았다. 매니저는 특정 인물들에게 어려운 일을, 그리고 일을 더 많이 준다. (고맙고 감탄하면서... 성과 평가는 진짜 챙겨줄게...) 아직 일을 잘하지 못한 주니어에게 일을 줄수록 보수관리에 팀의 공수가 더 든다. 중요한 일은 더더욱 잘 처리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너무 커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매니저의 큰 실수가 되어 버린다.
이후 어려운 문제가 내 앞에 떨어질 때, 나는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어떻게든 찾는 사람"이지 하고 남들과 태도를 조금 다르게 접근하려고 한다. "방법은 있다. 그게 뭘까?",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도움을 요청하고 받으려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할까?" 생각보다 조직에는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해보고 나면, 도와줄 수 있고 도와주고 그걸 성과로 가져가려는 사람들이 꽤 있다.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는 아예 이슈를 몰랐거나, 중요도를 몰랐거나,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지 몰랐거나, 또는 안 도와주고 싶어도 자신의 역할 범위에 있는 대한 도움 요청을 중요도와 함께 받게 되면 결국 도와줘야 한다.
사실, 갑자기 새 팀의 매니저가 된 것도 '이전 팀장님의 조직 이동', '본사의 조직 개편' 등의 변화 속 이 작은 팀을 당장 맡아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회사는 새로운 문제와 함께 '변화 관리', '성과 관리', '사람 관리'를 해보라고 역할을 줬다. 2개월 차, 쉽지는 않지만 정말 많이 배워서 의외로 재미있다. 모든 어려운 문제 해결에는 시행착오와 배움이 있고, 그걸 감당하며 나아가는 게 커리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오히려 과거에 고군분투하던 주니어 때보다 일과 적당한 심리적 거리 두기가 가능하고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그러면서 어제처럼 유독 정성을 들인 순간을 가끔 모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