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둘만의 첫 약속

둘만의 아지트

by 박지선


하나는 지금 당장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평생을 이 방에서 지내왔는데, 지금 이곳은 지구— 아니, 우주 어디를 가도 가장 불편한 곳처럼 느껴졌다.


사춘기라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의 반항기를 지난 뒤로 부모님도 이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것도 낯선 '남자'아이가 내 방에 있다니.

이 중대한 상황에 심장이 마치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동쳤다. 눈앞의 수박을 보며, 하나는 머릿속에서 수박씨를 고르듯 다음 행동을 골랐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까.

생각은 쉽지 않았다.


불현듯, 약간의 화가 치밀었다. 이 아이만 만나면, 평소엔 하지도 않던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게다가, 저 표정은 또 뭐람. 혼자만 평화롭다. 나만 바쁘다. 몸도, 마음도, 머릿속도.


그래,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자. … 잠깐, 침대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건가?

그런데 ‘자연스럽다’는 건 또 뭘까.

발에 본드라도 붙은 걸까?

아니면 여기만 중력이 강한 건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조차 까먹어 버렸다. 하나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온갖 노력을 쏟고 있을 때, 호수가 말을 걸었다.


“여기는 어디야?”


그 말에 하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걸음은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했다.


'휴—해냈다.'


호수의 시선을 따라 도착한 곳은 ‘바람의 언덕’, 하나의 두 번째 아지트였다. 몇 년 전, 창고를 뒤지며 놀다가 찾아낸 카메라로 하나는 온 동네를 누비며 사진을 찍다 언덕을 발견했다. 언덕이 주는 포근함에 압도당해 스르륵 셔터를 눌렀다. 그때 인화한 사진이었다. 하나와 바람의 언덕의 첫 만남의 순간.


'…아, 여기를 말해야 하나? 여기까지는… 뺏기고 싶지 않은데.’


대답을 기다리는 호수의 눈길이 계속 하나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 눈빛은 마치 찜질방의 뜨거운 열기처럼,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하나는 당황스레 시선을 돌렸다.


“여기… 그 '바람의 언덕'이라고 해. 그냥, 내가 붙인 이름이야. 내 아지트거든. 아지트… 알아? 바람맞기 좋고, 생각하기도 좋아서. 가끔 거기서 뛰어내려오면 기분도 좀 좋아지고… 바람맞는 거, 좋아해? 아, 너무 추우려나?”


그런데, 이 아이는 언제까지 내 얼굴을 이렇게 뚫어져라 볼 참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저기, 여기… 가보고 싶으면 뭐… 데려가줄까?”


우발적인 대사에 비해 꽤 신중한 마음을 얹어 달달달 떨며 말을 꺼냈는데.

뭐지, 왜 말이 없지? 하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봤다. 잠깐, 그의 눈이 살짝 커진 것 같았다. 어딘가 놀란 듯한 표정. 하나는 순간적으로 호수의 눈과 마주쳤다. 대답 대신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를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눈빛을 끝까지 바라보고 싶었다.

그때—

'좋아해.'


…그런 말이, 입 밖은 아니지만 공기 중 어딘가에서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헛소리였을까. 하지만 분명, 그 순간 그런 느낌이 있었다. 잠시 눈빛이 얽히고, 호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 하지만 방금 전까지의 적막을 깨기엔 충분했다.


“좋아. 그럼 내일, 비 안 오면 가보자.”

하나는 가볍게 숨을 쉬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비 오면… 언덕은 좀 힘드니까.”

“하나야, 연하나! 밥 먹으라니까!”


하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앞 바닥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만 듣고도 하나는 엄마가 문 앞에서 다 들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뭐라고 둘러대지 생각하던 찰나에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둘이 뭐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


엄마는 모르는 척. 둘을 흘겨보더니, 금세 말꼬리를 흘렸다.

“하긴… 뭘 해.”


다시 처음의 긴장이 돌아왔다.


“가, 간다고! 밥 맛있겠네. 배고파 죽을 뻔했네!”


하나는 엄마를 지나쳐 성큼 내려갔다. ‘휴, 뭘 하냐니. 뭘 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둘만의 첫 약속은 아주 작은, 그러니까 아직 아무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약속일뿐이라.


머릿속이 복잡해질 틈도 없이, 발걸음은 계단을 푸다닥, 요란하게도 밟아 내려갔다. 뒤에서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하나는 더 큰 소리로 그걸 덮어버렸다.


‘그래, 아무것도 안 했어. 근데 왜 이렇게… 숨이 차지.’

화요일 연재
이전 07화7. 토마토 한 모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