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마토 한 모금

사실 토마토는 달다.

by 박지선

5 일 연속, 세차게 비가 내렸다.

여름이란 원래 그런 계절이다. 무르익을 만하면, 꼭 비가 내려 누군가의 마음을 식히곤 한다.


호수가 다녀간 다음 날부터 시작된 장마는 텃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특히 토마토. 엄마와 함께 정성껏 키운 토마토들이 줄줄이 물러터졌다. 하나는 비를 뚫고 그나마 멀쩡한 것들만 골라 수확해왔다. 커다란 찰토마토는 다섯 개. 방울토마토는 핑크색 바구니에 절반 정도. 수개월의 정성이 남긴 결과치가 고작 이 정도라니.


하나는 방울토마토를 씻으며, 묘한 허무함을 느꼈다. 물론 키우긴 엄마가 더 열심히 했지만, 곁에서 보고 듣고 웃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애정이 붙었나 보다.


반짝이는 방울토마토 열 알을 고르고, 소중하게 그릇에 담아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하나는 한참을 그 방울들을 바라봤다. 조금 울퉁불퉁한 게, 어쩐지 귀엽다. 이것이 애정의 힘일까.


하지만 애정은 애정이고— 하나는 토마토 한 알를 집어, 한 입에 넣었다. 와작. 시큼한 듯, 달큰한 즙이 죽쭉 터졌다. 잘 익었다, 녀석.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으려던 순간, 문득 — 라면을 먹으며 나눈 호수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 집에 혼자 있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


하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오후 5시. 곧 6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밥은 먹었으려나.’


남은 방울토마토들이 담긴 그릇을 내려다보던 하나는 손에 든 한 알을 잽싸게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왜 그 아이가 생각났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게 다 아지트를 침범당한 충격 때문이야, 아마.’


요즘 부쩍, 생각이 많다. 아니, 생각이라기보단 마음이 자꾸 움직인다. 왔다갔다, 어디에도 닿지 않고 흔들리는 감정들.


하나는 침대에 누워 더듬 거리는 손으로 토마토를 집어 입에 넣고 천장의 무늬를 관찰했다.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아 보여도 자세히 보면 그 결이 어떻게 났는지. 어떤 규칙을 가졌는지 알 수있다. 어느 결은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이어질 것만 같다.


그 규칙에 익숙해 즈음. 순식간에 결이 뒤틀리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휘어진다.


‘이런, 규칙이 다른 거였네.’


하나는 천장 무늬의 결을 따라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이 자꾸 감긴다. 꿈벅, 자칫하면 꿈으로 빠져들 것 같은 순간—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엄마다. 그리고… 아빠? 뒤에 뭔가 말이 더 붙는 걸 보니, 둘이 같이 집에 들어온 듯하다.


하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졸린 눈을 비비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꿈인가. 나 자고 있는 건가.'


거실에 서 있는 사람. 호수다. 분명히, 호수다. 아빠 옆에 서 있는 아이가... 하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아직도 잠에서 다 깨어나지 못한 듯 호수를 바라봤다.


“하나야, 인사해. 지난번에 아빠가 말했지? 호수야.”


알아요… 그보다— 왜 왔는지를 먼저 설명해주는 편이 훨씬 반가웠을 것 같은데요. 아빠는 평소 친척들 이름도 잘 기억 못 하면서 어쩌면 저 아이에 대해서는 꽤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


하나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호수는 금방 하나의 표정을 읽었다. 참 오랜만인데도, 이 아이는 여전히 투명하구나. 그 생각에 속으로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안녕.”

“어, 안녕.”


호수가 인사하자 하나는 놀란 듯 반사적으로 인사를 받아쳤다. 자신이 나타난 것에 꽤 당황한 눈치였다.


“아버지가 일하러 가셨는데, 오늘은 못 들어오신다고 해서… 오늘 하루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저씨.”


호수는 하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듯, 자신의 상황을 먼저 설명했고, 곧장 아저씨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하나의 엄마는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미리 잘라둔 수박을 꺼냈다.

“하나야, 이거 들고 호수랑 방에서 좀 놀고 있어. 저녁 다 되면 부를게.”

“어? 방? 내 방? 얘랑?”

하나는 ‘방’이라는 말에 화들짝 반응했다. 사적인 공간인 만큼, 낯선 이를 들이는 건 껄끄러울 것이다. 그맘때 여느 여자아이들과 같이. 생각을 마친 호수는 식탁 의자를 슬쩍 빼며 앉으려 했다. 그때 엄마가 웃으며 덧붙였다.

“아, 방은 좀 그런가? 그래도 얘네도 다 컸잖아.”


하나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아빠가 아무렇지 않게 호수가 당기던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뭐, 하나 얘가 호수 안 잡아먹으면 다행이지.”


잡아먹는다니. 아직 하나를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호수가 만나본 하나는 울퉁불퉁한 행동 속에 수줍음을 감춘 17살 소녀였다. 장난으로 던진 말일 테지만, 이상하게 그 말은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시 말을 꺼낼 타이밍을 보던 호수는, 하나가 수박 그릇을 번쩍 들며 외치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뭐, 내가 너 잡아먹겠냐. 가자, 수박 들고!”

하나는 말끝을 부드럽게 넘기려는 듯 활기차게 웃으며 계단 쪽으로 성큼 걸었다. 호수는 그런 씩씩한 반응이, 오히려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말없이 따라 나선 계단에서는 불규칙한 ‘삐걱, 삐걱’— 오래된 나무가 두 사람의 무게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하나의 걸음은 다음 삐걱 소리에 맞춰 딛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여, 호수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부모님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 하나의 발걸음에는 살짝 힘이 실렸다.


‘쿵’— 방문이 닫히고, 하나는 책상 위에 수박 그릇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한참이나 수박을 바라봤다. 먹으려는 건지, 관찰하는 건지. 호수는 그 모습에 괜시리 불편함을 느꼈다.


'괜히… 왔나.'


하나는 가끔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순간이 있었다. 하나도 또래 여자아이들과 같이 개인의 시간이 필요했을텐데.


어색해 보이는 발가락이 안쓰러워 피하듯,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자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나가 수박을 들여다보듯, 이번엔 호수가 하나의 방을 천천히 훑었다. 벽지는 하늘색이고, 천장은 하얗다. 침대 위엔 방울토마토 몇 알이 남아 있었고, 한쪽 벽에는 만화책이 빽빽한 나즈막한 책장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액자에 담긴 사진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호수는 사진들 사이를 시선으로 따라가다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화요일 연재